202109 통권 제365호 - 대구 신암선열공원의 유일한 여성 독립운동가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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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50회 작성일 21-09-28 12:46본문
대구 신암선열공원의 유일한 여성 독립운동가 이혜경
김지욱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여성들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독립운동에 참가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교육 받게 된 것은 기독교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기독교를 통해 여성들이 굳건한 독립정신, 자강력 배양, 언행일치의 실천력, 단결력 등도 배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동양의 성리학은 여성을 탄압했다면 서양의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평등사상과 민주주의 교육을 통해 남자 못지않은 애국사상과 독립정신을 키워왔던 것이다.
이혜경 여사 또한 그러했다. 1889년 황해도 해주에서 개화파 인물인 이창직의 셋째 딸로 태어난 이혜경 여사는, 11살 될 때까지 캐나다 선교본부였던 원산에서 자라면서, 일찍부터 교회를 통해 개화사상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이어 서울로 이주한 후 1901년 연동여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할 때까지 연동교회에서 교육을 받고, 김정식 선생을 만나 성경과 함께 애국사상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 자세한 내용은 첨부파일을 확인하십시요.
김지욱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여성들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독립운동에 참가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교육 받게 된 것은 기독교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기독교를 통해 여성들이 굳건한 독립정신, 자강력 배양, 언행일치의 실천력, 단결력 등도 배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동양의 성리학은 여성을 탄압했다면 서양의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평등사상과 민주주의 교육을 통해 남자 못지않은 애국사상과 독립정신을 키워왔던 것이다.
이혜경 여사 또한 그러했다. 1889년 황해도 해주에서 개화파 인물인 이창직의 셋째 딸로 태어난 이혜경 여사는, 11살 될 때까지 캐나다 선교본부였던 원산에서 자라면서, 일찍부터 교회를 통해 개화사상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이어 서울로 이주한 후 1901년 연동여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할 때까지 연동교회에서 교육을 받고, 김정식 선생을 만나 성경과 함께 애국사상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 자세한 내용은 첨부파일을 확인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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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문화산책] 21-9.pdf (69.0K) 61회 다운로드 | DATE : 2021-09-28 12: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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