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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의정원 최후의 여성의원 방순희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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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562회 작성일 21-03-0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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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의정원 최후의 여성의원 방순희 여사
                                                                                                          -김지욱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대한민국 정부의 전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면 대한민국 국회의 전신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다. 이 임시의정원 의원 가운데엔 여성의원도 몇 명 있었다.
임시의정원 최초의 여성의원은 1922년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된 김마리아이고, 1923년에는 양한나가 경상도 의원으로, 1930년에는 최혜순이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으나, 해방 때까지 활동한 여성의원은 방순희 여사가 유일하다.
제34회 임시의정원에서 함경도 의원으로 활동한 방순희 여사가 당시 유일한 여성의원이었던 것에 대해 ‘우리통신’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사십여 명 의원 중 여자 의원은 오직 방순희 여사 일 인뿐이니 만록총중에 일점 홍이다. 부녀가 아직도 억울한 경경에 있는 조선 사회이므로 방 여사의 책임은 더욱 크다. 고군분투의 고독감도 있을 것이나 일천만 여성의 후영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용기도 날 것이다”
방순희 여사는 1904년 1월 30일에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7세 때인 1911년에 이주 한인을 상대로 상품위탁 판매와 여관업을 하는 부친 방도경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삼일여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꾸준하게 민족의식을 키우며 나라사랑의 마음을 성장시켜 왔다. 그러던 중, 15세 때인 1918년에 아버지의 권고로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고, 3·1운동 때는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일경으로부터 갖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23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방순희 여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신한촌 백산소학교의 교사가 되어 재러 한인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후 소비에트의 한인학교 폐쇄 정책이 시행되면서 1925년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여사는 고국 땅에서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을 바탕으로 반제국주의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1925년 9월,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관 개관식에 재러 한인 동포 자격으로 참석하던 날, 각국 외교관들이 동석한 그 자리에 조선을 상징하는 흰옷을 입고 나타나 일경의 주목을 받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사회주의 단체인 북풍회에 가입하는 등 청년들의 선전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얼마 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박희도의 집에 모 단체의 의용대장 임명장을 배달한 것이 발각되어 일경이 수사에 나서자 감시망을 피해 만주를 거쳐 상해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경은 방순희 여사의 잦은 러시아 영사관의 출입을 이유로 그녀를 ‘친러 공산주의자’로 보고 감시를 심하게 하기도 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방순희 여사는 1931년에 독립운동가 현익철과 결혼하였다. 현익철은 3·1운동 참가 후 만주로 망명하여 남만주 일대 항일무장투쟁을 총지휘한 독립운동계의 중진이었다. 하지만 만주 봉천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1936년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1938년 이른바 남목청 사건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말았다. 임시정부 청사인 장사 남목청에서 열린 김구, 지청천, 유동열 등의 3당 통합을 위한 회합자리에서 이운한이 난사한 총에 맞아 사망하였던 것이다. 김구가 그토록 믿고 있던 이운한이 배신한 것이었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방순희 여사는 슬픔을 딛고 193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의 임시정부는 미·영·소·중 등 연합국을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러시아어가 유창한 방순희 여사는 소련 담당으로 선정되어 중경 주재 소련대사관을 상대로 정부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때 나중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고급부관으로 활동한 김관오와 재혼했다.
1940년에는 중경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를 창립하게 되었는데 이때 집행위원장으로서 ‘대한의 여성과 청년들이여, 모두 일어나라’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구국의 책임이 어찌 남자들만의 몫이겠습니까? 우리 3천만 한국민족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성 아닙니까? 남녀의 역량을 합하여 각기 맡은 바 직분과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세계, 진선진미의 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라며 조선 여성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1943년에는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등 여성 독립운동가의 역량을 결집하였고, 독립운동계의 좌우 합작 운동에도 쉼 없이 분투하였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44년에는 중국 국민당정부와 임시정부 간의 협조로 결성된 대적선전위원회를 통해 일본군으로 참전한 한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방송을 하면서 반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45년 봄에는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위안부 여성 10여 명이 충칭 임시정부로 인계되어 보호받게 되자 이들의 교육을 전담하기도 하였다.
방순희 여사는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가장 오랜 기간 의정활동을 전개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방순희 여사의 조국 독립을 위한 멈추지 않는 열망과 피나는 노력을 이제야 기억해 내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출처 : 세명일보, 2019.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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