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개혁개방의 배경과 성공 요인

[대덕단상] 201810월호(통권 330호)
박병구
경북대학교 CORE사업단 교수

1. 덩샤오핑 개혁개방의 배경


1) 문화대혁명의 폐단

개혁개방을 논하기 위해서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년~1976년)을 이해해야 한다. 문화대혁명이 발생한 원인은 중국 공산당 내부에 특권집단이 형성되어 마오쩌둥(毛澤東)의 권력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특권집단과의 단절을 위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민중을 특권집단 타도에 동원하였다. 이때 동원된 민중이 홍위병(紅衛兵)이다. 문화대혁명 시기, 정치는 법치(法治)가 작동되지 않고 인치(人治)가 극에 달하였다. 당시 모든 중국 인민은 정치가였고, 자신이 곧 국가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민중의 정치동원이 어떤 나쁜 결과를 가져올지 예상하지 못하였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의 대표였고, 황제지상주의의 사고 하에 황제 아닌 황제로 군림하였다. 중국은 인민민주의 토양이 형성되지 못한 상황 하에서, 독립된 사법기구도 없었으며, 중국 공산당은 모든 자원을 장악하고 배분하면서도 감독을 전혀 받지 않는 봉건 파쇼독재정당이었다. 당 조직 명의로 명령하고, 행정을 집행하나, 당은 영원히 옳은 조직이며, 해당 당사자만 과오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공산당 조직은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 관본(官本) 독재체제였다.
인간의 실천이성은 실수를 경험한 후, 비로소 과오를 수정한다. 문혁 시기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경험한 중국 인민들은 두 번 다시는 문혁과 같은 정치적 혼란이 없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였다. 이러한 경험과 기억이 바로 개혁개방을 가속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2)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실패

신중국이 원했던 세계는 소련식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이상대로 실현되려면, 다음과 같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모든 인간의 욕망과 수요가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간의 수요와 주관성은 모두 다르다. 인간의 욕망은 경쟁을 촉진하고, 이익 쟁탈전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 시장경제는 사유재산제 보호를 강조하나, 『공산당선언』은 사유재산의 소멸을 강조하고 인간의 욕망과 경쟁을 부정하며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그 다음, 모든 인간의 이익이 일치해야 한다. 자원은 유한하므로, 어떻게 생산하고 분배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분배 과정에서 어떤 이는 만족할 것이고, 어떤 자는 불만을 가질 것이므로 이익의 일치는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노동 가치를 정확하게 계산해야 한다.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노동 가치와 공헌을 산술적으로 측정할 수 없으며, 노동량에 따라 분배한다면 유효한 노동력과 무효한 노동력을 계산할 수도 없다.
경제 모순이 첨예화됨에 따라, 사회주의 계획경제 모델이 경제발전에 유용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 인민이 역사를 창조한다는 마오쩌둥의 주장과는 달리 인민의 생활은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문혁이 끝난 후부터는 인민의 경제생활 개선이 중국 공산당 권력의 합법성 유지에 관건이 되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은 마르크스 혁명이론과의 고별(告別)이다. 덩샤오핑은 “생산수단과 생산력의 발전 등 경제력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이미 엄청난 격차가 발생했는데, 무슨 근거로 사회주의가 좋다(社會主義好)고 주장하는가?”라고 역설하였다. 덩샤오핑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을 알고 있었고, 문혁기간 동안 두 차례나 하방(下方)을 당한 이유도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개혁개방 후, 모든 정책은 경제발전에 복무하였으며, 경제발전을 위해서 중국 정부는 겸손히 배우는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1978년 5월, 중국은 부총리 꾸무(谷牧)를 대표로 하는 유럽 선진 문물 시찰단을 스위스 등에 파견하여 기업과 산업시설을 견학하였다. 아울러 미국·일본·영국·호주를 방문하고 돌아온 개혁파들은 서방으로부터 첨단 생산설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당시 중국은 설비를 수입할 돈이 부족하였다. 중국의 경제개혁은 자본주의 생산방식·설비를 도입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덩샤오핑은 먼저, 방직 설비를 도입하여 헐벗은 인민들의 의복 문제를 해결코자 하였다. 당시 중국 인민들은 패션 감각이 없었고, 옷 색깔도 너무 어두웠다. 그 다음, 철강 설비를 도입하였다. 덩샤오핑은 한국의 포항제철에 대해 무한한 부러움을 표시하였다.


3) 종속이론에서 탈피

동아시아의 종주권이었던 중국이 한국 등 동아시아 주변국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다는 사실은 중국 인민들 스스로 정치적 욕망을 자제하고 경제건설에 매진해야 한다는 동기를 자극하였다. 중국의 대표적 자유지식인 리션지(李愼之, 전(前)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의 회고록에 의하면, 1979년 덩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하던 비행기 안에서 리션지는 덩샤오핑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개혁개방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덩샤오핑이 대답하길, “개혁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다. 개방은 선진국을 향한 문호개방이다. 리션지가 다시 묻길, "중국은 왜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해야 합니까?" 덩샤오핑이 대답하길, “제2차 대전 후 미국에 줄선 나라들은 잘 산다. 그러나 소련에 줄을 선 나라들은 하나같이 가난하다.”덩샤오핑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야만 중국이 잘살 수 있다고 인식하고, 대만과의 긴밀한 융화를 위해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제안하며, 대륙과의 무역거래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제한을 해제하였다. 덩샤오핑은 “국제관계에서는 오직 실력과 능력만이 상호평등을 보장할 수 있다. 상대국을 대하는 태도는 겸손해야하며, 실력 없는 약자의 자존심은 오만함에 불과하다”고 역설하였다. 덩샤오핑의 실사구시는 중국이 후진국이란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 것이다. 당시 중국 지도부는 세계 경제의 주류인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조속히 따라가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강하게 체감하였다.
개혁은 기득 권력과 이익관계의 조정을 가져오므로 손실을 입는 집단과 쟁의(爭議)가 발생한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선부론(先富論)을 제창했을 때, 집단적으로 반대한 세력은 없었다. 개혁개방 후, 기업가와 노동자들은 장기적으로 형성된 좌파이데올로기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상해방을 이루고, 정형화된 집단행위에서 벗어나 개성화를 체현하였다.


4) 중국 공산당의 집권 위기의식

계획경제 시절, 중국 사회에서 신분 상승과 계층 간 이동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개혁파들은 1978년 2월 28일 열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문화대혁명을 “국민총생산의 총체적 붕괴”라고 평가하였다. 1949~1997년 사이, 많은 대륙인들이 빵과 자유를 찾아 홍콩으로 탈출하였다. 이런 사태에 대해 덩샤오핑은 “인민을 탓하지 마라, 중국의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다”라고 솔직한 자기 고백을 하였다. 만약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하지 않았으면 중국 공산당은 해체되었을 것이다. 덩샤오핑의 정치개혁은 중국 공산당의 집권 위기의식에서 시작되었다.

 

 

2. 개혁개방의 성공 요인


1) 시장경제의 존재

소련이 해체된 후, 미국이 러시아에 자본주의 시장경제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전문가를 파견할 정도로 러시아는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 반면 중국은 개혁개방 이전에도 이미 자본주의 경제활동이 암암리에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인민에게 별도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교육시킬 필요가 없었다.


2) 개혁개방 후에도 전면적인 사유화를 유보하였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는 극단적이고 혁명적으로 사유화를 진행하였으나, 중국은 강력한 중앙집권 하에, 전면적인 사유화를 억제하였다. 역사적으로 토지는 중국 봉건경제의 근본적인 요소였고, 공산혁명의 원인도 토지분배 문제 때문이었다. 계획경제 시절, 토지집중제를 통해서 경제문제를 해결하려했으나, 인민의 생활수준은 하락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선전(深圳)경제특구는 토지국유제 덕분에 특구 개발을 빨리할 수 있었다. 만약 전면적인 토지사유제로 토지보상 때문에 시간을 허비했다면, 중국 경제의 쾌속 항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3) 화교자본 등 외자의 지원

러시아가 외자기업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배척한 반면, 중국은 외자를 적극 유치하고 많은 혜택으로 유인하였다. 홍콩·대만의 화교자본과 한국·일본 기업들의 투자, 다국적기업은 중국 경제 발전의 중요한 동력이 된 반면, 소련에게는 홍콩과 같은 외자(外資)의 지원이 없었다. 덩샤오핑의 경제특구제도는 경제적 목적과 정치적 목적이 병존하였다. 즉 선전(深圳)경제특구·주하이(珠海)경제특구는 홍콩과 가까워 홍콩의 자본을 유입하면서 일국양제(一國兩制) 통일을 염두 해두고 설립하였다. 특히 홍콩은 광동성 주민과 혈연관계가 밀접하여 홍콩의 자본을 유인하는데 유리하였다. 샤먼(夏門)경제특구는 대만과 가까워 대만과의 통일을 염두 해두고 설치하였다.


4) 역사 인식이 미래를 결정한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중국 인민의 경제적 윤택과 생활 개선에 초점이 맞추어진 실사구시이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대해 공(功)은 공(功)대로, 과(過)는 과(過)대로 평가하였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인과(因果)관계이며, 역사에 대한 인식이 미래의 발전 방향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선거에서 승리한 집권자가 입맛대로 과거사를 재단하고, 자기 집권시대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자기부정(自己否定)의 역사관”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3. 국가 지도자의 책무


정치제도는 습관화된 관성이 있고, 시간이 흐르면 개혁 불감증이 생긴다. 이런 현상을 바꾸지 않으면, 새로운 위기가 발생한다. 국가 지도자가 발전·개혁·안정의 3자 관계를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미래는 결정된다. 안정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개혁이 어렵고, 안정이 없으면 발전도 진행될 수 없다. 발전·개혁·안정의 3자 중, 발전이 중심이고, 개혁과 안정은 발전을 뒷받침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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