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영토·변경(邊境) 문제에 대한 이해관계

[산학칼럼] 201912월호(통권 344호)
박병구
경북대학교 중국 문화와 통상 융합전공 교수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과 대만의 이해관계

알프레드 마한(Alfred T. Mahan)의 『해권론(海權論)』이 나온 후, 해양 변경(邊境)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중국 국민당은 남중국해에 대해 정부 차원의 행동 조치를 많이 취했는데, 특히 당시 국민당 정부는 프랑스의 남사군도(南沙群島)에서의 군사 행위에 대해 외교적 항의를 했으며, 남중국해 각 도서에 대한 조사도 진행하였다. 1950년대, 대만의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이 동사군도(東沙群島)에서 해전을 전개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고, 장개석(蔣介石)은 중국인민해방해군의 대만해협 통과를 용인하였으며, 대만은 태평도(太平島)에 군대를 주둔시킨 적도 있었다. 그래서 대만은 남중국해 주권 문제에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 1970년대, 서사(西沙)해전 당시, 중국인민해방군 함정이 대만해협을 지날 때, 대만은 통과를 묵인하였다. 비록 대만이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실질적 조치를 많이 하였으나, 대만은 남중국해 해역에 대해 완전한 권한을 주장하지 않았다. 남중국해 섬 29개 중, 베트남은 8개를 점령하고 있다. 과거 베트남의 남사군도에 대한 영토 주권 주장은 역사 계승권에 근거하였으나, 점차적으로 역사 계승권을 주장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베트남이 주장하는 영유권의 범위가 역사 계승권의 범위를 넘어 서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대륙과 대만 간 남중국해 협력 성과를 보면, 첫째, 2008년 『협력의향서』·『대조석유합약연장탐사기한수정협의』(台潮石油合約延長探勘期限修改協議)체결. 둘째, 2009년 1월, 타이베이에서 열린  제7차 양안 남중국해 협력 민간포럼(第7屆兩岸南海合作民間論壇)은 대만 외교부가 주최한 것이다. 셋째, 중국 대륙과 대만은 ‘양안-갑자학술논단-양안공동협력방어, 남중국해 공동개발’(兩岸-甲子學術論壇-兩岸共同協防, 共同開發南海) 회의를 공동 개최하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황가상(黃嘉祥)·나원(羅援) 장군이 참석했으며, 중국은 “대만 해군과 남중국해에서 협력을 할 수 있다. 남중국해에서 유사사태가 발생하면, 태평도(太平島)를 보급 기지로 활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마잉지우(馬英九) 총동 시절, 대만의 남중국해 정책 기본 관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중국해에 대한 권리와 권한은 대만에게 있다. 둘째, 쟁의를 보류하고 공동 개발한다. 평등 호혜의 입장을 견지한다. 셋째, 남중국해 정책은 대외 정책이고, 특히 대미(對美) 정책을 고려한다. 넷째, 대만은 지속가능한 발전관에 입각하여, 지역 평화와 해양 석유자원 개발·탐사의 협력에 중점을 둔다. 2008년 6월, 대만 대북(臺北) 시에 있는 명전대학(銘傳大學, Ming Chuan University, MCU)에서 열린 강진(江陳)회담은 중국 대륙과 공동 자원 탐사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강진(江陳)회담에서 “대만은 남중국해 주권에 대한 역사적 기원과 국제법 연구에 집중하고 있으며, 공동으로 권익을 수호하기 위해 중국 대륙은 태평도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중국해 문제에 대하여 대만이 국제협력을 한다면, 대만은 어떠한 국제적 지위로서 협력을 해야 하는가? 대만은 중국 대륙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원칙 때문에, 국제기구 가입 시 대만의 정식명칭인 중화민국(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을 사용할 수 없고, 중화타이페이(中華台北, Chinese Taipei) 명칭을 사용해야 하므로, 올림픽 모델 혹은 세계보건기구 모델로써 남중국해 문제에 참여할 수 있다. 현재 대만은 지역안보 협상 기제에서 갈수록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 대만은 중국 공산당의 남중국해에 대한 국제 영향력 제고로 남중국해 국제협상 기제에서 배제되었다. 그래서 대만은 협상 대표단의 수준을 격상하고, 양안 남중국해 협력 기구 설치와 ‘해양위원회’기구를 개혁하고자 중국 대륙에 제안하였다. 한편, 중국 정부는 민간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영토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도서 지역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함정이 남중국해 분쟁 지역을 순시할 경우, 국제분쟁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남중국해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어민의 어선을 활용하고 있다. 2013년 당시 중국 정부는 원양어선에게 연간 150만 위안(元) 정도의 재정을 지원하였다. 최근 중국 어선들의 어로 반경이 점차 커지고, 난폭하게 된 배경은 든든한 중국 정부의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

 

조어도(釣魚島)·오키나와 군도(群島)에 대한 중국과 미국·일본 간의 갈등관계

1943년 7월 카이로회담 이전, 미국 국무원은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에게 조어도와 오키나와 처리 방안에 대해 3종 방안을 제시하였다. 3종 방안은 첫째, 중국에 넘겨 관리하게 하는 방안. 둘째, 국제조직 관리 하에 두는 방안. 셋째, 일본에 반환하는 방안. 당시 루즈벨트는 중국에게 조어도를 반환하는 쪽으로 의사가 기울어졌다. 카이로회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장개석에게 조어도를 넘겨주겠으니 관리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런데, 정작 장개석은 루즈벨트의 조어도 관리 제안을 거절하였다. 장개석이 훗날 이일을 크게 후회하였으나, 미국은 이미 일본에게 관리권을 넘겨버렸다. 당시 오키나와 군도(群島)를 둘러싼 루즈벨트와 장개석의 대화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루즈벨트: “중국은 일본 남부의 섬들 처리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습니까? ”
장개석: “각하는 오키나와 군도(群島)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중국은 당장 오키나와 군도(群島)를 회수할 생각은 없고, 미국과 공동으로 관리하거나 혹은 국제가 공동 관리하길 희망합니다. 오키나와는 중국이 관리하는 것보다 국제적으로 공동관리가 더 타당합니다.”

장개석이 오키나와 군도 접수를 거부한 배경은 국공내전에 군사력을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장개석은 루즈벨트의 이런 제안을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루즈벨트가 여러 차례 이 문제를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은 중·미 공동 관리를 주장하며 머뭇머뭇하자, 루즈벨트는 장개석이 조어도와 오키나와를 원치 않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현재 일본이 조어도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일본이 비록 태평양전쟁의 패전국이지만, 미국에게 패전했지 중국에게 패전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군이 일본 본토를 점령하였고, 중국군이 주둔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영토와 안보 문제

모든 국가의 영토는 핵심 지역과 변경(邊境, frontier)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중국은 산(山)과 천(川)을 경계로 지역 간 격리가 생겼고, 중심으로부터 점차 먼 지역은 변경이 되었다. 중국은 왕조국가가 탄생·발전하면서 변경이 확대되었다. 진(秦)나라가 통일을 한 후,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하면서 변경 지역도 생겨났다. 중국의 변경은 왕조국가 통치의 변두리 지역이며, 화하(華夏)족 이외 다른 민족들의 생활 구역이었다. 연변자치주 조선족은 통일다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중국에게 대단히 모범적인 소수 민족이며, 중국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어떠한 테러 행위나 분열 기도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또 남방의 소수 민족도 중국 전체의 국가 안전에 위협이 된 사례는 거의 없다. 남방의 농경민족은 늘 안정을 갈구하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에게 위협이 되었던 소수 민족은 대다수가 서부 위구르족, 북방 흉노, 몽골, 여진족, 거란족, 만주족 등 유목 민족이었다. 신강 위구르족은 민족주의가 중국 소수 민족 중에서 가장 강하다. 서장(西藏)과 신장(新疆)은 면적이 대단히 광대하므로 서장자치구·신장자치구(自治區)로 통칭되지만, 자치구(自治區)가 하나의 성(省)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 반면 연변조선족자치주(自治州)는 인구가 적고 면적이 작으므로, 성(省)아래의 자치주(自治州)로 불린다. 자치향(自治鄕)과 자치진(自治鎭)도 면적이 작으면서 소수 민족의 거주지가 되고 있다.

수도 베이징과 함께 중국 국가 안보와 경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省)과 직할시로는 상해 시·천진 시·광동 성·신강·서장이 있다. 신강·서장 지역에서 무력시위가 발생하면, 전 세계의 모든 이목이 집중된다. 신강과 서장의 분리·독립 운동은 일반적인 상상보다 크다. 과거 한족(漢族)의 신강 지역에 대한 통제력은 미미하였으나, 신중국 성립 후부터 중국 공산당은 신강·서장지역에 대한 통제를 엄격히 하였다. 현재, 신강에는 외부의 간첩이 많다. 간첩 활동은 먼저 친구 관계를 만들고, 그 다음 경제적 어려움을 돈으로 매수하여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다. 신강·서장의 분리·독립 운동은 중국 전 민족의 분열로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신강의 민족 분열 문제는 위구르족과 한족 간 상호 모순이 빚어낸 결과이다. 서장도 국제관계에서 아주 복잡한 지역이다. 서장에는 미국·영국·인도 등 강대국의 영향력이 일정 부분이 미치며, 네팔의 영향력도 존재한다. 중국과 서방은 신장·서장 문제를 두고 거래를 할 수 있는가? 1970년대, 서장 지역의 사수육강위교군(四水六崗衛敎軍)의 유격대 진압을 두고 중국과 미국은 거래를 하였다. 사수육강위교군(四水六崗)은 지리명사(地理名詞)인데, ‘사수(四水)’는 금사강(金沙江)·난창강(瀾滄江)·노강(怒江)·아롱강(雅?江)이고, ‘육강(六崗)’은 찰와강(擦瓦崗)·망강왕(芒康崗)·마즉강(麻則崗)·목아요강(木雅繞崗)·색막강(色莫崗)·택공강(澤貢崗)을 가리켰다. 고대 서장(西藏)의 문헌은 사수육강(四水六崗)을 강파장족(康巴藏族) 지역에 대한 총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장 문제에 관하여 중국의 가장 큰 경쟁 적수는 미국이 아니라 인도이다. 국제관계에서 인도의 장점은 무엇인가? 첫째, 외교력이 강하다. 인도는 영국·미국·러시아와 우호 협력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둘째, 주변국가 중, 파키스탄을 제외하고 인도에 무려 위협을 가할 국가는 없다. 만약 서장 남부 지역에서 중국과 인도 간의 무장 충돌이 벌어진다면, 중국이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그 이유는 먼저, 중국의 군사력 중, 인도보다 앞선 분야는 미사일이 유일하다. 그 다음, 시장 남부 지역에 인도의 산악 부대가 10여 개 이상 주둔하고 있고, 중국은 산악 전투에 약하기 때문이다.

 

영토 주권의 상실 원인

영토는 주권 문제이나 가변적이다. 일국이 영토와 변경을 상실하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력이 쇠락하거나 외교 실패로 영토를 할양하는 경우. 중국은 쇠락 후, 외몽고와 베트남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외몽고를 소련에 넘겼고, 저우은라이(周恩來)는 베트남과 미안마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이는 내부의 혼란으로 변경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경우이다. 1860년 청(淸) 정부와 러시아 짜르(Tsar) 황제는 『북경조약』을 통해서 러시아에게 사할린을 할양하였다. 러시아는 청나라와 맺은 『북경조약』이 불평등한 조약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1999년 장쩌민(江澤民) 국가 주석은 러시아 옐친(Boris Yeltsin) 대통령과의 영토 담판에서 사할린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러시아에게 영토 주권을 완전히 넘겼다. 아울러 중국은 러시아와 국경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자 러시아 접경지역에 배치했던 군대도 철수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나, 중화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장쩌민은 나라의 영토를 팔아넘긴 매국노에 해당한다. 이런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작은 섬 조어도(釣漁島)에 대한 역사적 근원과 영토 주권을 강조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중국이 러시아에 사할린 섬의 주권을 넘기면서도 일본과의 조어도 분쟁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조어도의 전략적 가치, 일본과의 주도권 쟁탈 문제, 일본 배후에 있는 미국의 전략 의도를 모두 고려했기 때문이다.

둘째, 국제관계 힘의 역학관계와 국제질서, 그리고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영토 주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후의 베르사이유조약, 2차 세계대전 후의 얄타조약 등 국제질서의 전환은 변경(邊境) 구획에도 영향을 미쳤다.

셋째, 국가 지도자는 일반적으로 장기적 시각에서 국가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목전에 가장 긴요한 정권이익을 고려하기도 한다. 영토 양보가 정권 안정에 도움을 준다면, 양보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17년 11월 러시아 10월 혁명을 일으킨 레닌은 소비에트 정권을 위해 독일과 브레스트조약을 체결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는 영국·프랑스와 함께 협약국에 속해 있었고, 동맹국인 독일과 교전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1917년 10월 볼쉐비키혁명 성공 후, 소비에트 정권은 전쟁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1917년 12월 3일, 독일과 담판을 개시하였다. 당시 독일은 소비에트 정권에게 폴란드·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의 일부 지역과 벨루로시·라트비아의 전 영토를 독일에게 넘기고, 30억 프랑을 독일에게 배상하라고 요구하였다. 레닌은 소비에트 정권의 안정을 위해 독일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프하린을 위시한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평화조약 체결을 반대하고 제국주의와의 전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평화조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었고, 소비에트 정권은 독일에 100만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할양하며, 6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이로써 소비에트 정권은 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는 막 탄생한 소비에트 정권에게 한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독일이 패전하자, 소비에트 정권은 즉각 브레스트평화조약의 폐지를 선포하였다. 레닌은 주변국가와의 외교관계를 원만히 처리하기 위해 많은 영토를 원주인 국가에게 넘겼고, 러시아와 맺은 모든 불평등 조약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스탈린 집권 후, 다시 영토를 소련으로 편입시켰다.

 

미국의 3대 외교 정책과 동아시아 영토 문제

미국의 3대 외교 정책은 고립주의·먼로주의·문호개방주의이다. 먼저, 고립주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은 임기 말 고별보고서에서 고립주의 외교의 당위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에게 경고하길 “유럽은 100년 전쟁, 종교전쟁 등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지역이므로, 미국은 절대 유럽의 전쟁에 휘말려서는 안 되고, 대서양의 미국은 자신의 안보를 잘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조지 워싱턴의 경고처럼 유럽의 역사는 한마디로 전쟁사이다. 1618년~1648년 유럽 30년 전쟁 후, 베스트팔렌조약을 체결하였고, 100년 전쟁·나폴레옹전쟁·보불전쟁·보오전쟁·1차 세계대전·2차 세계대전 등 무수한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 다음, 먼로주의. 1823년에 제안된 먼로주의 외교정책은 1848년 유럽에서 『공산당선언』이 나온 후, 계급혁명전쟁이 북미지역과 남미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 1900년 제국주의는 중국을 마음대로 구획하고 갈라먹기를 자행하였다. 유럽과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 대륙 영토를 분할한 조계지(租界地)를 갖고 있었다. 영국은 장강(長江) 유역, 프랑스는 복건성과 운남성, 일본은 동북지역과 1911년 천진(天津)·한구(漢口)·소주(蘇州)·항주(杭州)·중경(重慶) 지역에 조계(租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중국에 조계지(租界地)가 없었다. 미국은 이것을 불평등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중국에서 이익을 분할하기 위해 제시한 외교 정책이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이었다. 문호개방주의자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1차 세계대전 후, 전쟁 방지를 위해 국제연맹을 주도적으로 창설하였다. 윌슨 대통령은 영국·프랑스·독일 등과 협정을 체결하였고, 국제사무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하였으나, 워싱턴의 고립주의를 고수한 의회는 국제연맹을 반대하였으며, 미국이 체결한 다자협정 문건에는 미국의 의무조항이 많았는데, 의무는 책임이 수반되므로 유럽의 내부 문제에 말려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유지에 따라 미국 의회는 의무 조항 폐기를 주장하였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기차로 전국을 돌며 국제연맹의 필요성을 연설하였으나, 격무에서 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중풍에 걸렸고, 결국 국제연맹 가입도 무산되었다. 히틀러는 미국을 각별히 유념하고 미국의 유럽 전쟁 개입을 두려워하였다. 히틀러는 미국을 ‘민주국가의 군수공장’이라고 평가하였다. 2차 세계대전 중, NATO 창설과 UN 설립을 위해 루즈벨트가 처칠과 회담을 할 때, 민주당의 루즈벨트는 공화당 의원들을 대동하고 회의에 참여했다. 결과적으로 NATO와 UN은 성공적으로 설립되었다. UN(United Nation)에서 국가를 State가 아닌 Nation으로 번역한 이유는 U.S.A(United States of America)와 관련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전, 유럽은 세계 지정학정치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전후, 유럽은 주도적 지위를 상실하였고 세계는 다극체제로 나아갔으며, 유럽·미국·소련이 경쟁하는 구도로 변하였다. 얄타체제는 미국의 통제 하에 있던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국가, 아시아·아프리카·남미 신생 독립 민족국가가 상호 견제를 이룬 양극체제였으며, 미·소 대국 간,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세력균형 체제였다. 얄타체제가 균형을 이루었을 때, 세계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1945년 반파쇼전쟁 승리 후, 미국과 소련은 공동의 적이 소멸되었고, 미·소 대국 간의 동맹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결국 반파쇼전쟁을 위한 미·소 동맹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파열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지역은 경제적·정치적·전략적으로 미국의 세계패권 전략에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세계 각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 식민세력을 약화시키고, 공산주의의 영향을 억제하며,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를 전면적으로 통제할 장기적이고 전면적인 계획이 필요하였다. 투르만(Harry S. Truman) 대통령은 1947년 세계는 민주와 독재로 나뉘어졌다고 선포하고, 정치적 대결·제적 봉쇄·군사적 포위 전략을 주창하였다. 1949년 1월 20일, 투르만은 재선 취임 연설에서 미국 외교의 4대 중점 행동원칙을 제안하였다. 첫째, 유엔 지지. 둘째, 세계경제부흥계획(마샬플랜) 계속 추진. 셋째, 자유 국가와의 우호협력 강화, 침략 위협 반대(NATO 설립). 넷째, 미개발 지역에 대한 기술 원조. 전자 3개항은 모두 미국이 전후 이미 추진해왔던 조치였고, 마지막 항은 새롭게 제안된 전략이었다. 1949년 6월 24일, 투르만은 이 계획을 실시하기 위해서 국회에 특별문건을 발송하고, “만약 아시아·아프리카·남미 지역을 지원하지 않으면, 자유가 적대세력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미·소는 협력에서 대결 구도로 전환하였고, 조지·케난(George F. Kennan)의 ‘봉쇄이론(封鎖理論, Management of blockade)'이 풍미하기 시작하였다. 미·소는 전후 세계질서 구축과 유럽 등 일련의 국제문제에서 모순과 충돌이 갈수록 첨예화되었다. 새로운 국제 정세에 직면하여 투르만은 루즈벨트가 설계한 미·소 간 협력을 통해서 세계 질서를 유지하려는 전략구상이 국제정세 변화에 적응할 수 없으므로, 미국은 대외 전략 특히 대소련 전략과 정책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대외전략은 ‘선(先) 유럽, 후(後) 아시아'이었고, 유럽이 미국 대외 확장 전략의 중점이었다. 중국 공산혁명의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미국의 동방전선에 타격을 주었고, 미국은 동아시아 전략의 중점을 일본과 조선으로 전환하였다. 당시 미·소 대립은 전 지구적으로 팽창하고 있었으며, 구조적으로 충돌의 지점이 한반도가 되었다. 미국은 전 지구적인 범위에서 이익을 보유·향유하고 있다. 경제이익과 군사이익에 대해 미국은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의 New frontier 정책은 “미국의 안보는 미국 국경 내 뿐만 아니라,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어떤 지역에서의 안보도 함께 보장한다.”는 개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지위를 가장 먼저 승인한 서방 국가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홍콩의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중화인민공화국의 법적 지위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 승인과 외교관계 수립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면서도 외교관계는 1979년에야 비로소 체결하였다. 1972년 닉슨(Richard Nixon)이 중국을 방문하지 전까지, 중국 언론은 미국을 미제국주의로 칭하다가, 닉슨 방문 당시에는 미합중국(U.S.A)로 정식 호칭하였다.

 

변경(邊境)의 중요성과 한국 외교의 과제

1970년 대 냉전시절, 중국은 소련과 냉전을 벌이던 일본·미국과 관계를 개선하였다. 당시 중국은 조어도 주권 문제를 강력히 제기하지 않았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육지 변경(邊境)이 주된 관심 사항이었다. 변경 지역은 전략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 강대국은 변경 지역에 대한 통제로써 주변국과 경쟁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억제한다. 광활한 변경이 없는 국가는 국가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받아 결코 강대국이 될 수 없다. 현재도 국가 간 변경 지역에 대한 쟁탈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국가 발전에서 외부적 요소의 영향이 갈수록 커지고, 변경 지역에 대한 쟁탈이 가열되면서 변경의 보호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과거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그러나 현재 영국이 미국에 대해서 자신의 옛 영토에 대한 영토주권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중국의 변경 확대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고대·중세 역사 변경에 대한 중국의 새로운 해석과 재정립은 중국과 영토를 맞대고 있는 한반도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와 국경·영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으나, 일본·베트남·필리핀 등과 영토 분쟁을 겪고 있다. 만약 미국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동아시아를 떠나 고립주의 외교정책으로 선회한다면, 미국이 없는 동아시아는 행복할 것인가? 만약 미국이 동아시아를 떠난다면, 일본은 독도 침탈 야욕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낼 것이고, 중국은 서해와 동중국해·남중국해에서 영토 확장을 강화할 것이다. 중국 해군이 ‘제1열도’와 ‘제2열도’를 벗어나서 원양으로 나아가는 것은 필연적이다. 한국은 중국·일본과 정규화된 협상 기제를 만들어 불필요한 정보로 인한 오판을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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