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학(國學)의 형성·발전과 쇠퇴, 그리고 부활

[대덕단상] 202008월호(통권 352호)
박병구
심천대학 당대중국정치연구소 객좌교수

중국 국학의 형성과 발전

국유학(國有學)은 『예기(禮記)』에 처음 등장하였고, 『예기(禮記)·학기(學記) 』에는 주(周)나라 교육의 등급과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古之?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가유숙(家有塾)의 가(家)는 25 호(戶) 가옥들이 하나의 마을에 함께 거주하는 여(閭)이다. 기층 민중의 가(家)에서 가르치는 가유숙(家有塾)은 지금의 사숙(私塾)이다. 500 호(戶)를 묶어 당(黨)이라 칭하였고, 상(庠)은 당(黨)에 설립한 학교였다. 12,500 가(家)는 수(遂)였고, 수(遂)에 설립한 학교가 서(序)였으며, 상서(庠序)는 고대 향학(鄕學)이었다. 주나라 이전에도 상(庠)·서(序)·교(校) 이 세 가지 종류의 교육 형식이 있었는데, 상(庠)은 사격·무도 연습으로서 화살 쏘는 훈련과 예(禮)를 학습하였다. 주나라 최고 교육기관은 국학(國學)이었고, 한(漢)나라부터는 태학(太學)으로 칭해졌으며, 청조 말년에는 국자감(國子監)을 설립하였다. 고대에는 중국 자신의 학문을 국학(國學)이라 칭하지 않았다. 중국이 언제부터 자신의 학문을 국학이라 부르게 되었는가? 청나라 말기, 서방에서 전래된 신지식을 서학(西學)이라 불렀고, 서양의 신학문이 중국에 미친 충격은 대단히 컸기 때문에 서학에 대응하는 국학의 개념을 사용하게 되었다.

서학이 전래된 이후, 100년 간 중국 문화와 서양 문화가 교차하는 과정 중, 국학에 대한 개념 설정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첫 번째 개념은 국보(國寶)이다. 중국은 국학을 국보(國寶)로 칭하기도 하였다. 국보는 물적 형태로 중국 전통 문화 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두 번째 개념은 국수(國粹)이다. 청나라 말기부터 국수(國粹)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한 후, 경극(京劇)·중의학(中醫學)·무술·서예 등의 기예(技藝)를 국수(國粹)라 칭하였다. 무형문화유산이 바로 이런 기예를 포괄한다. 세 번째 개념은 선진(先秦) 시대 경전과 제자백가 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한(漢)나라 경학(經學), 위진남북조시대 노자와 장자의 학문인 현학(玄學), 수당(隨唐) 도학(道學), 송명(宋明) 이학(理學), 명청(明淸) 실학(實學) 등과 함께 문학의 영역인 선진시부(先秦詩賦), 한(漢)나라 부(賦), 6조 시대 변문(?文), 당송(唐宋) 시대 시사(詩詞), 원(元)나라 곡(曲), 명청(明淸) 소설을 포괄하는 문화와 학술이다.

 

아편전쟁 후, 중국 국학의 대응책

아편전쟁 후, 중화주의 자존심과 서양 군사력 간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유심주의를 위주로 하는 유학과 서양 과학기술 문명의 충돌; 수양을 위주로 하는 근본 철학과 과학 논리의 충돌이었다. 제국주의의 침략 상황에 직면하여 중국은 세 가지의 대책을 내 놓았다.

첫째, 국수주의. 아편전쟁 때, 중국학자들이 가장 선호했던 단어는 국수(國粹)였고, 서방에 대한 배척 심리를 투영하였다. 서방에서 전달된 문물이 갈수록 많아지는 상황 하에서, 중국 전통 문화를 부정하는 위기가 출현함에 따라, 가치 있는 전통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는데, 이를 국수(國粹)라고 불렀다. 당시 보수파는 중국문화 수준은 여전히 세계 일류라고 자부하였다. 국수(國粹)의 깃발이 등장한 시기의 국학은 서방 문화에 대한 대항적인 면이 있었고, 중국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자기 문화를 보존하려는 욕구가 강하였다.

둘째, 중체서용(中體西用).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후,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패배의 원인이 군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조의 부패한 제도에 있으므로 정치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군대만으로는 부국강병을 이룰 수 없고 중국도 일본처럼 입헌군주제로 정치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양무운동(洋務運動)은 서양의 기물(器物)을 도입·학습하였고, 무술변법(戊戌變法)은 서양의 제도(制度)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무술변법은 정치적으로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 바꾸는 것이고, 경제적으로 전통적인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을 버리고 농공상(農工商)과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실업(實業)을 주창하여 철도총국을 세우고 국가은행을 설립하여 국가 예산을 작성하였다. 아울러 교육 방면에서는 전국 각지에 중국 학문과 서양 학문을 함께 가르치는 학교를 세울 것을 요구하고,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北京大學의 전신)을 열어 팔고문(八股文)으로 관리를 뽑던 과거제를 폐지하고 학생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냈다. 무술변법은 기존의 군주제를 여전히 유지하면서 군주전제를 군주입헌으로 개혁하는 개량운동이었다. 실제로 캉요우웨이(康有爲) 등은 광서제(光緖帝) 황제에 의지하여 개혁을 추진하는 한계를 보였다.

셋째, 전면적인 서구화. 5·4운동과 신문화운동(1915-1923년) 이후, 중국은 과학기술·사회제도와 사상·문화 방면에서 서방을 전면적으로 수용하였다. 신문화운동은 중국 전통 문화를 격렬히 비판하였으며, 중국 문화는 중국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모두 포기하고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상황 하에서, 국학 혹은 중국 특유의 전통 가치와 형태도 보존하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국고(國故) 형태의 새로운 전통 문화 보존 운동이 생겼으며, 과거부터 역사적으로 내려온 자료와 서적 등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정리하였다. 국고(國故) 형태의 국학은 현대적인 연구 방법으로 변신하였고, 문사철(文史哲) 지식과 연구 자료들이 전공으로 분류되기 시작했으며, 공자부터 손중산까지 문화유산을 보존·계승하고자 하였다. 당시 대학들도 국학 연구기관을 설립하였는데, 청화국학연구원(淸華國學硏究院), 북대국학문(北大國學門), 제노국학소(齊魯國學所), 연경국학소(燕京國學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연구 기구들은 대학 내에서 국학을 보존·정리하고 연구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문화유산은 학문적 연구 대상에 불과한 것이었고, 죽은 물건으로 간주되었으며, 현실 경제생활과는 무관하였다.

 

1993년 후, 중국 국학의 부활

1949년 신중국 성립 후, 극좌 공산주의 운동으로 국학은 과소평가를 받았고 공식적으로도 사용하지 않았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1993년 이후부터 국학이란 용어가 중국 정부 공식 문건에 다시 등장하였다. 특히 1995년 WTO 체제 출범 후, 국제 교역에서 문화 역량이 중요시되면서 대학 캠퍼스와 각 성(省)에는 공자상(孔子像)을 비롯한 제자백가 선현들의 동상이 우후죽순 세워지고 있다. 당대 중국에게 국한은 어떤 의의가 있는가? 국학은 정신 가치이며 영혼의 문화이다. 특히 이학(理學)의 전제 조건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물음이다. 이학은 근본적인 원칙성을 사유하게 하며 토론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중국 문화콘텐츠의 힘은 제자백가 사상의 다양성 등 국학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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