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세계체제 형성과 중국의 한국전쟁 인식

[대덕단상] 202006월호(통권 350호)
박병구
심천대학 당대중국정치연구소 객좌교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형성

월러스타인(Immanuel 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체제 형성 과정을 살펴본다. 국제정치 체제는 15세기 전후 유럽 자본주의의 탄생과 발전에서 시작되었다. 유럽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정복·해외 식민지 확장이 이루어졌고, 국제 분업을 통해 세계시장이 형성되었다. 17-18세기 민족국가는 서유럽→북유럽→남유럽→북아프리카→북미로 확산되었다. 민족국가의 확산은 서양 문명의 외연 확장을 가져왔다. 유럽은 30년전쟁(1618-1648) 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주권국가가 탄생하였고 주권국가들은 국제법을 제정하였다. 17-19세기 유럽 주요 국가들은 프랑스대혁명·명예혁명을 완성하고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1760년대 1차 산업혁명 후, 생산력 확대는 세계체제 형성의 물질적 조건을 제공하였다. 자본은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끊임없이 팽창하는 속성이 있다. 유럽의 자본주의는 값싼 생산요소를 찾아 아시아·아프리카와 남미로 이동하였으며, 그 결과 아시아·아프리카와 남미는 점차 자본주의 세계체제로 편입되었다. 19세기 중후부터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점차 자급자족의 봉건경제 지역과 국가로 확대되었고, 그곳에서 자본주의 국가들은 염가의 원료를 구매하고 토지를 약탈하여 강제로 국제 분업을 실시하였다.

자본주의 역사는 두 단계에 걸쳐 변천하였다. 첫 번째 단계는 자유 경쟁의 결과 독점자본주의의 탄생이다. 1870년대부터 시작된 2차 산업혁명은 생산력을 더욱 발전시켰고, 사회적 부(富)가 소수의 독점자본가에게 집중되었다. 소수의 자본가가 생산과 자본을 독점하는 독점자본주의는 국가경제와 정권을 통제하고, 자본주의 국가는 독점자본가의 이익대변자로 전락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자본주의의 금융 독점으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필요로 하는 복지국가의 탄생이다. 자본주의의 분화는 국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는데, 파시스트 히틀러는 국민경제의 군사화·무기 수출과 전쟁을 통해서 독점자본주의의 폐단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코자 하였다. 2차 대전 후, 서유럽은 자본주의와 민주공화제를 결합하였으며 사회복지국가의 길로 나아갔다. 이는 국가 재정이 풍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국민은 높은 수준의 복리를 원하므로, 민주주의가 인기영합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고도 복지국가에서 적절한 복지국가로의 전환 배경과 1929년부터 풍미한 케인즈(keynes)주의가 1979년부터 비판을 받게 된 배경은 모두 정부의 재정 부족 때문이었다. 중앙정부의 재정이 바닥난 상황에서 대규모의 공공사업 투자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중국의 한국전쟁 인식

2차 세계대전은 사회주의의 승리이자 민주주의의 승리이며, 자유와 파시즘의 대결에서 자유주의의 승리였다. 1950년대 동아시아는 좌우이데올로기 영향으로 모든 지역에서 진영 간 대치 국면이 나타났다. 한국전쟁은 봉건지배 계급을 타도하기 위한 계급전쟁인가? 2차 세계대전 후, 유라시아를 휩쓴 사회주의 광풍으로 인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의 국제 전쟁인가?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이유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 동북 지역 안전에 대한 고려; 마오쩌둥의 공산혁명에 대한 신념과 의지; 미국을 격파하려는 모험심;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제고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 이틀 만인 5월 27일, 공개 성명을 발표하고 군사적으로 한국 군대를 지원할 것임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1950년 6월 28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8차 회의에서 “아시아의 일은 아시아 인민이 관리(管理)해야 하며, 미국이 관리(管理)해서는 안 된다. 미국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한반도 문제 해결은 가장 가까운 이웃인 중국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강변하며, 중국의 한반도 개입을 당연한 권리로 주장하였다. 1950년 9월 22일, 중국 외교부는 “중국 인민은 영원히 조선 인민의 입장에 설 것이며, 미국의 확전 음모를 엄중히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50년 9월 30일, 미군이 서울을 수복했을 때, 주은래(周恩來) 총리는 “중국 인민은 외국의 침략을 절대 용인하지 않을 것이며, 제국주의자의 인접국에 대한 침략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10월 3일, 주은래는 주중 인도 대사 파니카르(Panikar)에게 “만약 미군이 38선을 월경하면, 우리는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관여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관여’·‘참여’·‘인접국’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체제에서 주변지역으로 밀려날 위기감 때문에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중국에게 한국전쟁은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만과 연계된 문제이기도 하였다. 중국은 한국전쟁과 인도차이나전쟁을 연계하고, 국공(國共)내전에서의 미·중 충돌 연장선상에서 한국전쟁과 인도차이나전쟁을 인식하였다. 중국은 1차 세계대전 후 설립된 국제연맹은 영국과 프랑스가 조종하였고, 2차 세계대전 후 설립된 국제연합은 미국이 조종하며, 유엔군은 평화 수호 군대가 아니라 미국의 용병이라고 폄하하였다. 당시 중국의 유엔대표가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는 점에 입각하여 중국은 유엔을 미국이 조종하는 국제기구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에서 중국은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및 유엔군 결성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남북 대립을 객체화하고, 중·미 대립을 주체로 인식하였다. 중국은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1개월 전, 이미 미국의 38선 월경을 고려하고 있었다. 중국은 만약 북한이 한국전쟁에서 패한다면, 미군이 압록강 강변까지 진격하고, 결국 중국 동북 지역의 안보가 위협받는다는 입장이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우열을 가리지 않으면 사회주의 혁명과 확산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한국전쟁을 자본주의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이념전쟁으로 간주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자본주의는 곧 제국주의이므로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은 사회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숭고한 이념전쟁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 지역은 영토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은 한반도에 대해 자신의 안보를 책임지는 ‘방어벽(藩)’·‘보루(藩)’로 인식하고, 한반도에 대한 외세의 개입을 자신의 세력 범위와 영향력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였다. 중국은 조공종번(朝貢宗藩) 체제를 통해 속국을 통제하였으며, 조공종번 체제 이외의 다른 형식의 대외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공종번 체제는 종주국과 속국 간의 불평등한 권력관계였으나, 각자의 국가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구축하였다. 번속국(藩屬國)이 조공종번 체제로 편입되면, 타국으로 부터의 침략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어 국내정치를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반면 종주국(宗主國)은 국제적으로 명분을 얻었으며, 국경 지역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조공종번 체제 당시 중국은 엄격한 의미로 현대적인 민족국가가 아니라, 중앙이 주변부를 흡수하고 선도하는 공동체였다. 정치적으로 종번관계(宗藩關係)는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듯이, 땅에는 두 명의 왕이 없으며, 가정에는 주인이 둘일 수 없다.”는 예치질서(禮治秩序)로써 통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법제(宗法制)를 기초로 삼아 부권(父權)·부권(夫權)·군권(君權) 간의 등급과 질서를 강조하는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 후,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축소되었으나,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국제 지위를 제고하였고, 한반도에서 다시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패권체제 구축의 연장선으로 인식하고 한미동맹을 냉전시대의 유산이라 주장하지만,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조공종번(朝貢宗藩) 인식은 2차 세계대전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참고 문헌
박병구 : “동아시아 조공종번(朝貢宗藩)체제와 북·중 심리적종번관계(心理的宗藩關係) 형성 연구”, 전국대학 통일문제연구소협의회 통일교육센터·한국민족통일학회 2010 공동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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