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안(兩岸) 통일 가능성에 대한 고찰

[대덕단상] 202004월호(통권 348호)
박병구
심천대학 당대중국정치연구소 객좌교수

양안(兩岸) 분열의 단초 : 국공내전과 국공합작

역사는 승리자의 기술(記述)인가? 중국 공산당은 대륙의 권력을 찬탈 한 후, 중국 역사를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기술하고 있다. 중국 국민당은 1912년 남경(南京)에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화민국임시공화국 정부를 수립한 공로가 있다. 또 국민당의 남경정부는 비록 완벽한 관세자주권 회복과 영사재판권 폐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1928년-1930년 체결된 조약에서 관세자주권을 규정하는 등 제국주의에 빼앗긴 주권 회수에 노력하여 상당한 성과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개정신약운동(改訂新約運動)이다. 개정신약운동은 국민당이 제국주의와 교섭을 통해 불평등관세를 자주관세로 조약을 개정한 것이다. 관세자주권의 회복으로 국민당 정부는 관세를 인상할 수가 있었고,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각종 산업진흥정책을 실행하였으며, 공업 제품에 대해 통일소비세를 부과할 수 있었다.

중국 국민당 입장에서는 국공합작에 대해 지우고 싶은 집단기억이 존재한다. 국공합작과 국공내전의 발단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9·18사변)과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盧溝橋事件 혹은 七七事變)이 발단이 되어 중·일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항일전쟁도 종결되었다. 8년간의 항일전쟁을 전개할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은 내전을 벌일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 대륙에서 물러난 뒤, 대륙의 주인 자리를 놓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5년간 국공내전을 치렀다. 국공내전 동안, 국민당이 통제하던 구역이 바로 국통구(國統區)였다. 국민당의 특무통치(特務統治)는 사찰과 감시·감독을 통해 정치적으로 탄압을 가하는 통치를 말한다. 보갑제도(保甲制度)는 남경국민정부 시기, 현(縣) 이하의 기층행정제도로서 연좌제를 실시하여 반항 활동을 억제하였다.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려온 중국 민중들은 국공내전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에 따라 국공(國共) 양당은 내전을 피하기 위한 협상을 시도하였다. 1945년 8월 14일, 장개석(蔣介石)은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중경(重慶)에서 국가의 대계를 논의하자고 제의하였다. 1945년 8월 8일, 모택동과 주은래가 중경에 도착하여 국공회담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 회담은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하고 추상적인 정치협상회의를 개최하여 건국방안(建國方案)과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소집한다는 원칙만 합의하였다. 이것이 『쌍십협정(雙十協定)』이다. 모택동과 장개석 간의 회담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국민당과 공산당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동북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군대를 급파하였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장개석은 1946년 6월 26일, 공산당에 대한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결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하였다. 국공내전 초기 1년은 국민당 군대가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모택동은 전략적 후퇴를 개시하며 도시와 해방구를 포기하였다. 모택동은 전면전을 피하고 적을 유인하여 분산시키는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였다. 1947년 6월, 유백승(劉伯承)과 등소평이 무한(武漢)·남경(南京)에 육박할 수 있는 대별산(大別山)으로 진격해 들어감으로써 전세가 국민당에서 공산당으로 기울게 되었다.

결과론적인 가정이지만, 만약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이 없었다면, 국공합작도 없었을 것이고 국공내전으로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망가는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공산당은 통일전선전술에 대단히 능란하다. 3만 명에 불과했던 중국 공산당 홍군(紅軍)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국공합작의 기회를 틈타 유격 전술을 펼치며 힘을 비축한 후, 국민당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대륙의 권력을 찬탈하였다. 사회주의 천하 통일의 혁명전쟁은 중국 공산당 정권 장악의 기회가 되었다.

 

이등휘(李登輝) 총통 시절, 양안 갈등 관계

1988년 1월 13일, 장경국(蔣經國)의 뒤를 이어 총통직에 오른 대만 전(前) 총통 이등휘(李登輝)는 원래 대만 공산당 당원이었다. 이등휘가 제안한 양안 통일 방안이 중국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중국 공산당은 이등휘를 비난하지 않았다. 1995년 6월 9일, 이등휘가 미국 코넬대학을 방문하고, ‘민지소욕, 장재아심(民之所慾, 長在我心)’즉 ‘민이 바라는 바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있다’제목의 강연을 통해 민주주의의 승리를 강조하며 대만 독립을 주장하자, 이에 반발하여 중국인민해방군은 1995년 7월 21일-7월 28일, 강서(江西) 성 연산(鉛山) 미사일 기지에서 동풍(東風)15미사일 6발을 발사하였다. 그 공격 목표 지점은 대만의 최북단인 부귀각(富貴角) 북방으로부터 7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1995년 8월 15일-25일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1996년 3월 18일-25일 육해공군 합동 상륙작전 훈련을 실시하였다. 당시, 대만 가권 주가 지수가 1300 포인트 이상 폭락하였고, 대만 민중은 전쟁 발발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중국인민해방군은 대만에 대해 무력 공격을 감행할 수 없었다. 그 원인은 먼저, 대내적으로 대만 경제·사회 구조의 변천, 국민당 이외 세력의 정치 자유화 요구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위기에는 가치위기와 시정(施政)위기가 있다. 일반적으로 경제 자유와 부유, 다원화 교육과 보급이 대중의 정치 참여와 의식을 제고하여 개발도상국가의 가치위기를 초래한다. 과거 대만은 중국 공산당의 무력 공격을 빌미로 권위주의 체제 유지가 가능했으나, 대륙의 개혁개방이 장경국(蔣經國) 권위주의 체제에게 압력으로 작용하여 권위주의 체제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다음, 대외적 원인으로 대만과 미국의 관계 때문이다. 양안 문제는 중국의 내부 문제이고, 타국이 간섭할 사안이 아님에도, 미국의 개입으로 국제 문제로 비화되었다. 양안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미국은 상수로 존재하고 있다. 냉전시절, 미국은 권위주의 체제가 대만 정치 안정화에 도움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장개석·장경국 권위주의 정권을 지지하였다. 미국은 경제 원조를 통해서 대만의 이공계 기술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였고, 기술 관료들은 대만 경제를 발전시켰다. 또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대만에도 친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대만은 정치·경제·군사·기술 등 다방면에서 미국과 협력하고 있으며, 대만의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 때문에 중국은 섣불리 전쟁을 감행할 수 없다. 대만의 모든 국방 시설과 시스템은 대륙을 겨냥하고 있다. 미국은 대만에 대한 영토 야심이 없으나, 대만에 대한 영향력 행사로 중국 대륙을 억제하고 있다. 실례로, 미국은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면서도 『대만관계법(臺灣關係法)』을 통해 대만에게 무기를 판매하였다. 미국은 양안 통일을 바라지 않고 대만 독립을 원하지도 않으며(不統不獨), 전쟁도 화합도 바라지 않는 (不戰不和) 것이 전통적인 대(對) 대만정책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2020년 3월 11일, 미국 상원은 ‘타이베이법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는데, 이것은 미국이 대만을 사실상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의도이다. 미국은 대만 독립과 소수 민족 문제를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꽃놀이패로 활용하고 있다.

 

양안 통일 가능성

국공내전이 중단된 후, 양안은 상당 기간 동안 교류가 단절되었다. 비록 일정 정도 경제통상 거래는 있었지만, 실제 경제 교류를 하는 인구 비율은 낮았다. 그러나 대만은 갈수록 생활·취업 문제 등 세세한 경제 문제가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에, 대만 민중의 대륙에 대한 태도 역시 변화하고 있다. 현재 대만 민중들은 대륙에 대해 과거와 같은 혐오감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다만, 대만 남부 지역 주민들은 중국 공산당을 상당히 불신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중화민국은 모두 하나의 중화를 추구한다. 국가 발전에는 문화의 역량이 중요한 작용을 한다. 중국은 문화 응집력이 강하여 전통 문화를 계승하고 전승하는 능력이 있으며, “우리는 모두 중국인이다(我們都是中國人)”라는 중화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중국 문화에 대한 중국인들의 근성이 바로 중국 통일의 문화적 배경이다. 중국 공산당의 장기 집권은 중화민족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중국 대륙과 대만의 통일 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세대와 계층에 따라 다르다. 부모 세대들은 대만과의 통일을 갈구하며 당연히 가능성이 크다고 인식하나, 청년층들은 통일을 크게 기대하지 않으며 갈구하지도 않는다. 중국 공산당이 대만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원칙은 대만과 모든 것을 토론할 수 있으므로, 대만으로 하여금 협상 테이블에 나오게 하는 것이다. 1992년 11월, 중국 대륙의 양안관계협의회와 대만의 해협교류기금회가 구두 방식으로 “해협 양안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한다.”는 인식을 공유하였다. 양안은 2008년 16개항 협의에 서명하고 경제협력위원회도 조직하였다. 중국 대륙은 군사·경제 규모에서 비교 우위에 있고, 대만은 민주주의 제도에서 비교 우위가 있다. 중국 대륙과 대만의 큰 차이점은 민주화 정도이지만, 중국이 민주화로 인해 소련 해체와 같은 운명을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인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 양안의 가장 민감한 문제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이다. 만약 중국과 대만이 같은 5권 분립(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고시권, 감찰권)을 채택한다면, 상호 정체성이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중국 공산당이 민주사회주의당으로 전환하고 국민당과 통일을 논의한다면, 사불양립(死不兩立)의 관계에서 공동공존(共同共存)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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