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는 어떻게 중국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는가?

[대덕단상] 202003월호(통권 347호)
박병구
심천대학(深?大學) 당대중국정치연구소 객좌교수

유가의 국교화 정책

유가(儒家)는 인격 수양을 통한 도덕적 인격체만이 천하를 다스리는 덕치(德治)를 강조하였다. 덕치에 기초한 평천하는 군자의 이상적 가치의 최대화이고, 가치의 적용 범위가 전체 구성원으로 확대되어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유가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은 부단한 수양만이 덕(德)으로써 천하를 감화시킬 수 있으며, 백성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이다. 군자의 수신은 부패와 무능을 방지할 수 있으며 정치의 출발점이다. 유가는 도덕 수양이 자신의 독선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선(善)으로 인도하고자 한다. 예(禮)는 사회생활 중 인간관계를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인간의 근본은 인(仁)이고, 예(禮)는 인(仁)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실현한다. 인(仁)은 인성이고, 예(禮)는 행위의 평가기준이다. 종교는 인간 내심에 존재하는 인식이다. 종교의 중요한 역할은 구원이다. 불교는 출세(出世) 즉 속세를 벗어나 세상의 욕망으로 부터 자신을 회피하는 종교이다. 반면 유가는 입세(入世)의 철학으로서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 나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유가는 군주가 살아생전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실천하고자 한다.

역사는 관념의 역사이며 사상은 역사의 연속성 상에서 형성된다. 한(韓)나라의 동중서(董仲舒)는 진(秦)나라의 통치 이념인 법가 사상이 과도할 정도로 엄격했고, 결국 이것이 부메랑이 되어 진(秦)나라에게 재앙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백가를 다 몰아내고 오직 유가만을 존중하자(罷黜百家, 獨尊儒術)”고 주장하며, 유가로써 중국 사상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며 백성의 어버이라는 관념을 전파시키는 데는 유가가 가장 적격이라 판단한 동중서는 귀천(貴賤)과 장유(長幼) 등 엄격한 계급질서로써 황제 중심의 대일통(大一統)을 세우고자, 한무제(漢武帝, 기원전 156년 7월 14일-기원전 87년 3월 29일)에게 유가 사상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채택할 것을 건의하였다. 유가의 국교화는 한원제(漢元帝, 기원전 48년?기원전 33년 재위)때부터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새로운 사상의 변화를 접수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가의 국교화 정책 이면에도 법가가 여전히 중요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법가는 현대적 의미의 법치가 아니었고, 군주는 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직 백성들만 법의 통제를 받은 통제와 형벌 위주의 법치였으며, 사회 동란을 방지하는 도구였다. 법가의 법(法)은 백성의 행위 규범이었다. 한비자(韓非子)는 “인간 근심의 근원은 사람을 믿는데 있고, 사람을 믿으면 지배를 당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비자가 군주를 중요시 한 이유는 군주의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비자의 법(法)은 정의가 아니라, 권력을 장악하고 백성을 통치·관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천명관(天命觀)과 민주계몽사조(民主啓蒙思潮)의 출현

동중서는 “인간 세상의 성패는 천명(天命)이 결정하며, 천자(天子)는 하늘의 명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동중서는 천명관(天命觀)으로써 봉건 정권의 합리성을 논증하였다. 천도관(天道觀)은 하늘의 기상 변화와 인간 길흉화복의 미신적 요소를 함의하였다. 천리관(天理觀)은 송명(宋明) 이학가(理學家)들이 제안하였다. 이학(理學) 체계에서 지적한 것은 신비한 우주 본체이고, 천리(天理)에 대한 논증을 통해서 자연과 사회의 질서를 영원화하며, 천리(天理)는 자연과 사회의 최고 법칙이라 강조하였다. 아울러 천리(天理)와 인륜(人倫) 간에 상호 연계를 통해서 천리(天理)가 봉건사회의 영원불변의 준칙이 되었다. 유가는 통치 질서의 합법성은 하늘(天)에서 나온다고 인식하였다. 동한시대(東漢時代), 유가 사상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매김하였지만, 점차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드러내게 되었다. 유가는 치열한 논쟁을 통한 이론적 성숙이 아니라 신비한 도술(道術)적인 면에 빠져 유가(儒家)가 유술(儒術)로 바뀌게 된 것이다.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은 바로 이런 유가의 신비주의와 도술적인 색채에 대한 비판으로서 나온 책이다. 왕충은 『논형(論衡)』에서 동중서(董仲舒)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반박하였다. 천인감응설이란 “하늘로부터 천명(天命)을 받은 황제는 하늘의 의지에 따라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므로 국가 통치는 물론이고 자연의 운행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며, 만약 황제가 정치에 실패하여 부덕한 행위가 있으면 하늘은 재앙을 내린다.”는 것이다. 동한(東漢) 시대에는 유심주의(唯心主義)가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였고, 당시 지배계급은 군권신수설과 인과율(因果律)을 주장하였다. 유가는 도의(道義)를 논할 때, 존군(尊君)을 절대 잊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통치자의 이익에 복무하던 유가는 유교 경전을 불변의 진리로 해석하였다. 명말청초(明末淸初) 시기, 주자학에 반기를 든 민주계몽사조(民主啓蒙思潮)가 나타났는데, 대표적 학자로서는 황종희(黃宗羲)·고염무(顧炎武)·왕부지(王夫之)가 있었다. 황종희는 황제가 혼자서 독단적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는 인치가 아니라, 법에 의해서 국가가 다스려지는 법치를 강조하며, 군주전제(君主專制)는 ‘천하의 큰 해악’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황종희·고염무와 왕부지는 “주자학은 관념적이고 비실용적이며 사회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배운 것을 실제 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경세치용(經世致用) 학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자학은 정신(理)이 인류와 자연의 근본이라 했지만, 왕부지(王夫之)는 세계는 물질(氣)로 통일되고 물질의 변화와 운동에 의해서 인간과 자연이 탄생한다고 주장하는 유물주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왕부지(王夫之)는 “세계는 물질의 기(氣)로 통일되고, 기(氣)의 변화와 운동에 의해서 인간과 만물이 탄생하고 이(理)는 기(氣)에 종속하고, 이(理)는 스스로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만약 기(氣)를 떠나면, 이(理)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유가의 대일통

천인합일(天人合一)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이다. 고대의 농업 생산은 주로 자연의 힘에 따라 수확량이 결정되었으므로, 인간들은 자연계에 의탁하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인간·집단 간 조화 세계를 실현해야 만이 평등을 실현할 수 있으며, 분쟁을 막아 국가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도 인식하였다. 중국의 고유 정치 개념은 민본과 예(禮)의 질서이며, 안정유서(安定有序)는 예(禮)의 표현이다. 중국 철학은 헤겔의 변증법과 같이 대립과 투쟁이 아니라, 오늘의 이해와 내일의 이해가 함께 존재한다. 유가(儒家)의 이상정치(理想政治)는 다양한 정치 입장을 배합하여 마찰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유가의 대일통(大一統) 사상은 중국 정치의 기초이다. 개혁개방 후, 중국은 ‘조화사회’실현이 지상과제가 되었는데, 공익과 사익의 조화가 정치의 중요한 의무이며, 계층 간 조화를 실현하는 것은 중국 사회주의의 당면 과제이다. 중국의 정치 제도와 규칙에 녹아있는 철학은 여전히 유가 등 중국 고전에서 기원하고 있다. 시대와 통치 주체의 변천 여부를 초월하여 중국을 면면히 지배해온 통치 사상은 유가사상(儒家思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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