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독재정권에 맞서 2·28민주운동에 직접 참여한 최용호 경북대 명예교수(75)는 “2·28민주운동은 4·19혁명의 효시가 된, 광복 이후 첫 민주화 운동”이라며 “이번 국가기념일 지정으로 2·28민주운동이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그 자리를 되찾았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경북대 사대부고 10회 졸업생이다. 1960년 고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 2·28민주운동에 직접 참여했다.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2009년 은퇴해 현재 경북대 명예교수, 산학연구원 명예이사장,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고문을 맡고 있다.
▶ 2·28민주운동이 58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소회가 남다를 텐데….
“긴 세월이 흘렀다. 다른 지역 민주화 운동과 비교해 사상자가 없다는 이유로 그동안 2·28민주운동이 폄훼돼 왔다. 4·19혁명의 출발점으로서 객관적 평가도 부족했다. 마침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첫걸음이었음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친 보람을 느낀다.”
▶2·28민주운동을 앞두고 당시 사회 분위기는 어떠했는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집권을 위해 직선제 개헌 파동을 일으키는 등 이미 민심은 여당인 자유당을 떠났다. 1960년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거 판세는 여당이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민주당 조병옥 대통령 후보가 급사하자 선거 일정을 변경하고 야당 후보들의 선거 유세를 차단했다. 당시 ‘유정천리’라는 노래를 사대부고 학생들이 조병옥 박사를 흠모하는 내용으로 가사를 바꿔 불러 무기정학을 받은 기억도 난다.”
▶ 학교와 경찰의 제지에 어떻게 맞섰나.
“그때 사대부고에선 학교측이 교문을 걸어 잠갔다. 학생들이 길거리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학교 안에서 단식 농성을 하다가 어두워져서야 담을 넘고 거리로 뛰쳐 나갔다. 지금 대구시청 자리에 있던 경북도지사 관사 쪽으로 행진해 결의문을 낭독하다가 일부가 잡혀갔다. 처음엔 경찰도 어리둥절했다. 이 같은 자발적 시위를 처음 봤기 때문이다. 이어 대구상고·경북여고 등에서도 합세해 학생 시위를 주도했고 시민도 함께 동참해줬다.”
▶2·28민주운동의 의의와 향후 과제는.
“2·28민주운동은 고교생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우리 역사상 첫 민주화 운동이다. 또 서울에서 시작해 지방으로 퍼지는 다른 민주화 운동에 비해 대구에서 출발해 전국적으로 확산돼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의의가 있다. 앞으로 이를 국채보상운동과 함께 대구시민 정신으로 후대에 계승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