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문화산책

수원 자혜병원 앞의 3·1만세운동, 김향화 의기

[회원문화산책] 202012월호(통권 356호)
김지욱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기생은 우리 근대화 역사에 있어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집단이지만 언제나 역사의 주변에만 맴돌았고, 한 번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며 살아왔다.

신분차별이 심했던 조선시대 이래로 기생은 소·돼지 잡는 백정과 함께 가장 천대받는 신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기생들은 자신을 그냥 시대의 조류에 내맡겨 놓지만은 않았다. 스스로 근대화의 담지자가 되어 보수적인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타파하고 개화와 독립운동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의식을 깨우치고 자기표현을 적극적으로 하여 사회참여와 진출을 이룩하고 개인과 사회의 개혁을 위해 열정적으로 몸을 내던지곤 했다.

여기에 그런 일을 몸소 실천한 경기도 수원의 의로운 기생이 있으니 그가 바로 김향화(행화) 선생이다.

1918년에 발간한 기생조합 홍보자료 ‘조선미인보감’에 기술된 김향화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본디 경성 성장으로, 화류 간의 꽃이 되어, 삼오 청춘 지냈구나. 가자가자 구경 가자, 수원산천 구경 가자. 수원이라 하는 곳도, 풍류기관 설립하여, 개성조합 이름 쫒네. 일로부터 김행화도, 그 곳 꽃이 되었세라. 검무, 승무, 정재춤과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막힐 것이 바이 없고,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죽은깨가 운치 있고, 탁성인 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 동동 중등 키요, 성질 순화 귀엽더라.”

그만큼 외모 면에서 출중하고 기예 면에서도 최고를 기릴 만큼 뛰어난 기생이었던 것이다.

김향화 선생은 1896년 7월 16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어릴 적 이름은 순이었으나 가정형편으로 인해 18살에야 기적에 이름을 올렸다. 왜냐하면 15살 무렵 수원으로 시집을 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을 하고 부친마저 사망하자 곤궁한 생활형편을 극복하고자 기생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순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향기 향(香)에 꽃 화(花). 김향화(혹은 김행화)로 제2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스무 살 무렵부터는 수원 군 내의 최고의 기생으로 자리 잡아 유학생들, 지식인들과 교분을 쌓으며 자아의식을 키워나갔다.

22살 되던 1919년 1월 21일 김향화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대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고종이 승하했던 것이다. 김향화 선생이 소속된 기방은 모두 휴업 간판을 내걸었고, 기생들은 화려한 비단옷, 비녀 대신 소복과 나무비녀를 꽂고 음주가무를 중단하고 근신을 했다. 그리고 1월 27일 서울의 덕수궁 대한문 앞에 도착하여 다른 백성들과 함께 곡을 하면서 망국의 설움을 토로하였다. 고종황제가 일본인의 손에 독살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 매일신보에 대서특필되었고, 수원지역 기생들의 애국심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3월 1일, 서울에서 3·1운동이 전개되고, 이는 전국적인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3월 19일에는 진주 기생 6명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잡혀갔다는 기사가 한 신문에 실렸다. 이를 계기로 김향화 선생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하고 수원의 기생 30여 명을 모아 거사일을 정했다. 이날은 바로 화성행궁 봉수당에 세워진 자혜병원에 성병검사를 받으러 가는 3월 29일이었다.

이들은 모두 거사를 앞두고 몰래 태극기를 제작했다. 그리고 거사당일엔 치마 속에 태극기를 감추고 병원 앞으로 모여 들었다. 당시 자혜병원 앞은 경찰서, 군청 등 식민통치기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병원 앞에 다다르자 갑자기 김향화 선생이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모두가 치마 속에 감췄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일제히 만세를 따라 불렀다. 일본 경찰들이 총칼을 들고 달려와 위협했지만 기생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까지 경찰들을 막아서며 만세행렬에 동참하였다.

이날 시위로 기생들은 모두 검거 되었고, 김향화 선생은 주모자로 지목되어 징역 6월을 선고 받고 옥살이를 했다. 수사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사회적으로 천대 받고 멸시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기생들은 여느 국민과 마찬가지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김향화 선생은 출옥 이후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거사 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뒤를 봐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9년 수원시의 건의로 뒤늦게 포상을 받게 되었고, 비록 후손은 없지만 그녀의 표창장과 메달은 수원시 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어 오가는 관람객들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

그녀의 피 맺힌 만세운동은 두고 두고 기억될 것이다.

출처 : 세명일보, 2019.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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