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문화산책

류관순의 올케 조화벽 지사

[회원문화산책] 202005월호(통권 349호)
김지욱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한국 여성독립운동사에서 주목되는 가장 대표적인 기록물은 1898년 찬양회의 <여권통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907년 나랏빚을 갚기 위해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서 전국적으로 다양한 여성 단체의 역할이 부각되었고 이후 1919년 3·1운동 전개 도중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반포를 통해 여성의 독립운동 활동이 한국 근대사의 주역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여성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지방도시 그것도 강원도 양양에서 전개된 여성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한국 근대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단지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동조하면서 일어난 일시적인 활동이 아니다. 오랜 역사적 경험과 축적된 민족의식을 토대로 발현된 여성의식의 각성이며, 위기에 처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깨우쳐 들고일어난 주권수호활동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 여성들은 스스로 주체성과 존재성을 확인했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방향성을 탐구하면서 자발적으로 구국운동을 실천했다. 따라서 역사의 이면에 침잠되어 있는 한국 근대 여성독립운동의 의미는 실로 중요하다고 하겠다.

오늘은 우리의 기억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강원도 양양의 독립운동 여성지도자인 조화벽 지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조화벽 지사는 전신불수가 된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신 효녀였으며, 남편 류우석의 옥바라지를 도맡아 한 충실한 아내이자, 고아가 된 류 씨 형제들을 돌봐준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또한, 정명학원에서 수학한 600여 명의 학생들을 훌륭히 졸업시킨 현명한 선생님이었고 무엇보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여성 운동가였다.

조화벽 지사는 1895년 10월 17일 강원도 양양의 감리교 전도사였던 조영순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본래 강원지역은 전통적으로 유림세력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개신교 전파로 인해 종교에 심취했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남녀동권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다. 특히 1910년 원산성경학교와 1912년 원산루씨여학교에서 수학한 후, 멀리 떨어진 개성 소재의 호수돈 여자고등보통학교로 입학하며 겪은 경험들은 그녀의 인생역정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여자고등보통학교는 수도 매우 적었고, 따라서 조화벽 지사가 속한 여고보생은 매우 희귀한 여성 지식인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호수돈 여학교의 입학과 뒤이어 발생한 3·1운동의 발발은 고흥 류 씨 집안과의 자연스러운 인연으로 자리매김하여 류관순의 오빠 류우석과의 결혼으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더욱 확고한 신념을 가진 독립운동가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조화벽 지사는 민족 투쟁으로 눈을 돌리고, 남편 류우석과 시아버지 류중권, 시어머니 이소제, 류관순, 삼촌 류중무, 사촌과 조카 등 집안인물과 함께 3·1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항일독립운동을 펼치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조화벽 부부의 상호 조력과 결실은 1932년 양양 정명학원 설립과 농촌 계몽운동에서 더욱 빛이 났다.

조화벽 지사의 첫 항일 운동은 호수돈 비밀 결사대 활동부터 시작되었다. 호수돈 여학교에서는 3월 3일부터 10여 차례의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호수돈 기숙생들이 조직한 비밀 결사대가 있었다. 이들은 2월 28일 북부 예배당 목사인 강조원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여 장을 받고, 이후 이화학당에서 온 안병숙과 만나면서 개성 3·1운동의 싹을 틔우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이들은 구본관 4층의 기도실에서 목숨을 걸기로 결의하고는 커튼을 뜯어 태극기를 만들며 3·1운동 준비를 마쳤고, 드디어 1919년 3월 3일, 학교에 퇴학원서를 써놓은 후 기숙사의 담을 넘어 거리로 나갔다. 죽음을 각오한 용기로 시민들을 향해 일장연설을 하고 시위대열에 합류해 만세를 부르며 개성 지역의 3·1운동을 10여 차례 이끌었는데 이후 일본 경찰과 헌병대에 연행되었지만, 개성 군수의 훈계조치 뒤 석방되었다.

이렇게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휴교령을 내려 만세 운동을 저지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호수돈 여학생들을 전국으로 흩어 각지방의 3·1운동을 더욱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이때 조화벽 지사도 고향인 양양으로 복귀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은 그녀의 소지물을 전부 압수하고 관사로 끌고 가서 심문을 하였다.

하지만 조화벽 지사 가방의 ‘버선목 솜’ 속에 숨겨둔 독립선언서는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지역민에게 전달되어 만세운동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즉 강원 지역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양양 3·1 운동의 새싹을 조화벽 지사가 틔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양양지역의 유교세력, 기독교세력, 중재세력이 통합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조화벽 지사는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온몸을 바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건국운동을 일으켰지만 소련군의 박해를 받고 월남해 1975년 서울에서 79세의 일기를 마쳤다.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분의 여성 독립지사를 통해 나라 사랑의 정신을 새삼 깨달아 본다.

출처 : 세명일보, 201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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