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URI 30년을 되돌아보다[1]

[특별기고] 202004월호(통권 348호)
최용호
경북대 명예교수ㆍ본원 초대 원장

[산학연구원 창립 30주년 회고록]  
올해 산학연구원 창립 30년 주년을 기념하며 최용호 초대 원장님의 URI 30년 회고록을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오늘날 선진대국은 산학협동을 주축으로 기술혁신과 경제의 지속적 성장이 이뤄지고 있다. 우리 대구지역에서도 산학연구원(URI)이 출범한지 30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출범 당시40대 후반이었던 필자는 어느새 80대에 접어들려고 한다.

창립 회원으로 초대 원장을 맡아 3연임을 함으로써 10년 동안 열심히 뛰었다(1990. 1 ~ 2000. 2). 상임고문(2002. 2 ~ 2003. 2), 명예원장(2003. 2 ~ 2008. 5), 이사장(2008. 5 ~ 2015. 2)을 역임했으며, 2015년부터는 명예 이사장 겸 상임고문으로 인연을 맺고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회고의 글을 부탁 받은 것 같다. 30년 이야기를 한꺼번에 다루기는 어려워 10년 단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990년대(1990~1999)

 

1990년 6월에 창립총회

1990년대는 연구원을 창립해 기초를 다지던 시기이다. 필자의 원장 재직기간과 일치하며, 구영모(대구백화점 대표이사) 초대 이사장이 일찍 별세함으로써 오순택(동일산업 대표이사) 2대 이사장이 3연임을 하면서 봉사하던 시기이다.
URI의 창립일은 1990년 6월 5일로 되어 있는데, 그 전에 5개월간의 준비기간이 있었다. 그해 1월 초순 기업의 경영활성화와 지역의 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대구지역 산업계와 학계의 젊은 지도자들이 산학협동 조직을 만들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계명대학교 경영학과의 이병찬 ? 최만기 · 박명호 등 교수들이 단체설립을 위한 자료수집 차 두 차례 서울을 다녀왔으며, 2월에는 준비위원회를, 3월에는 실무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4월에는 발기인 모임을 갖고, 정관과 설립취지문 작성, 사업계획서와 예산안 준비, 회원 영입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5월 9일에는 발기총회를 갖고 19명의 창립준비위원 명단을 확정했으며, 경북대학교 부광식 교수로부터 “산학협동의 의의와 긴요성”이란 주제의 강연을 들었다. 이것이 산학연구원의 제1차 세미나이다.
5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990년 6월 5일 프린스호텔에서 110여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산학연구원 창립총회가 개최됐다. 대구경북을 대표하는 경제계 인사들과 학계 원로들이 내빈으로 참석했다. 축사는 경북대학교 천시권 총장이, 기념사는 필자가 했다.

이사장에는 대구백화점의 구영모 사장, 원장에 경북대학교 최용호 교수, 부원장에 대구대학교의 우재현 교수와 금복주의 김동구 사장이 선임됐으며, 사무국장은 계명대학교 박명호 교수가 맡았다. 총회에 이어 미국 네브라스카대학 이상문 교수의 「산학협동의 필요성과 미래의 방향」에 대한 특강이 있었다. 이것이 제2차 월례 세미나인데, 2020년 1월말로 350회를 맞는다.
연구원의 대표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는 ‘월례 세미나’는 국내에서는 아마도 최장수 기록이라 생각된다.

 

『산학연구원 소식』  발간

산학연구원 출범은 산학협동이란 개념이 생소하게 느껴지던 시절이라 지역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지역의 일간 신문과 방송매체가 개원과 활동 내용을 크게 다루어 주었다. 연구원에서도 창립하던 달의 마지막 날에 『산학연구원 소식』 창간호를 발행했다. 대외 홍보와 함께 회원들에게 유용한 경영과 기술 정보를 신속히 제공하고, 회원들의 참여와 소통을 촉진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제호는 그 해 9월에 『산학경영기술연구원 소식』 으로 바뀌었다가, 1998년 9월에 다시 『산학리뷰』로 개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9년 마지막 달까지 104호를 발간했는데, 매일신문 홍종흠 논설위원이 편집위원장으로 봉사했다. 그의 헌신적 노력에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뉴스레터의 골격은 산학칼럼, 기술경영정보, 산학경영기술, 회원업체 탐방, 대덕단상 등으로 돼있었는데, 내용이 매우 알차다는 평가를 받았다.

 

산학연구원에서 산학경영기술연구원으로

연구원이 문을 연 다음 달인 7월에 들어 대백상호신용금고 사장실 입구에 책상 하나에, 여직원 1명으로 임시 사무실이 꾸며졌다. 당면문제는 당시 주무 관청인 상공부로부터 사단법인 허가를 받는 일이었다. 이는 연구원의 공신력과, 회비 징수와 기부금 모금(기업의 손비 인정)과 직결되어 있었다. 지역 출신 관료와 이정무 국회의원의 협력을 받아, 연구원 명칭에 ‘경영기술’이란 단어를 넣는 조건으로 상공부의 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장수홍 ㈜청구 회장의 특별배려로 봉덕동에 있는 효성코어 1층(지금의 앞산 서한이다음 아파트 자리)에 정식 사무실을 마련하여 12월 5일 『산학경영기술연구원』 현판식을 가졌다. 사무실은 1995년 9월 현재의 위치인 대구은행 신암동지점 2층으로 옮겨,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대구은행의 특별한 성원에 감사드린다.

 

월례 세미나와 산업시찰

연구원을 대표하는 세미나사업은 1990년 발기총회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30년 동안 350회의 월례세미나가 있었는데, 국내외의 학계, 산업계와 관계의 저명인사와 전문가들이 발표자로 나섰다. 그 주제는 주로 산학협동, 기술개발, 지역경제 활성화, 경영혁신 사례발표, 기업 국제화 등이었다. 세미나 장소는 1990년대에는 아리아나 호텔을 제일 많이 이용하였다.
초기에는 1인이 발표를 하는 형식보다는 2~3인이 주제발표를 하고, 지명 토론자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에는 월례 세미나 이외에 국내 유명인사는 물론, 미국, 일본, 중국, 프랑스 등 해외 인사를 초청하여 특별 강연회와 국제학술토론회를 10회 개최하였다.

산업시찰은 학자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업종의 경영자들에게도 좋은 정보와 참고자료를 제공해 준다. 산업시찰을 겸한 세미나는 1990년 9월에 한국OSG(주)에서 시작됐는데, 1992년까지 (주)평화발레오, 삼립식품공업(주)(현 SL 주식회사), (주)금복주, (주)범상공, 삼풍직물(주), 신라철강(주), (주)정안 등 회원사 위주로 진행됐다. 그 뒤에도 삼익공업(주), (주)갑을, 화성산업, 대구백화점 등으로 이어졌으며, 1994년에는 중국 칭다오(靑島) 산업시찰도 했다. 1999년 말까지 모두 116차의 월례 세미나를 가졌는데, 그중 32회가 산업현장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지금도 이 프로그램은 지속되고 있다.

1993년부터는 역외로 범위를 넓혀 대기업 방문행사를 병행했다. 그해 2월에는 구미의 대우전자, 옥포의 대우조선, 창원의 대우중공업을 다녀왔다. 이어서 삼성전자 구미공장과, 1994년에 경인지역 삼성그룹 계열사(기흥 반도체, 삼성종합기술원 등) 방문 세미나도 이뤄졌다. 그 뒤에도 대우 계열사 방문 세미나는 지역을 달리하면서 1995년, 1997년, 1998년 세 차례에 걸쳐 있었다. 1박 2일의 행사라 주요 기간산업의 동향 파악은 물론, 우리들끼리 분임토의 등을 통해 연구원의 진로를 함께 고민하면서 회원들 간의 우의도 크게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

네 차례에 걸친 대우그룹 계열의 대형 행사들은 모두 대우인력개발원장과 대우정보통신 대표이사를 지낸 김용섭 회장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100차 세미나의 연사로 전국경제연합회 회장인 김우중 대우 회장을 모시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본인이 직접 세미나 발표자로 여러 번 나서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물론 지금도 김용섭 회장의 애정과 성원이 산학연구원 발전에 아주 큰 힘이 되고 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는 1994년 7월과 10월에 “대구 경북지역 경제인 간담회”를 두 차례 공동으로 주최했다. 1999년 6월부터는 “지역발전포럼”을 네 차례, 함께 개최한 일이 기억에 남는다. 이 포럼의 지속적 개최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타 지역과의 형평성이 문제가 되어 3년 만에 중단되었다.
한편 지역의 광역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세미나의 주제발표를 맡아 지방정부의 경제발전 전략과 시책방향을 설명하고, 회원들로부터 애로사항과 건의를 받아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노력해주었다. 1990년대에는 이해봉 대구시장과 이의근 경북도지사가 1회, 조해녕 시장이 2회, 문희갑 시장이 4회나 연사로 나와 주었다. 역외에서는 고재웅 광주광역시장과 이인제 경기도지사가 초청되었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세미나 강연은 2000년대에 들어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대구광역시에서는 문희갑 · 조해녕 · 김범일 시장이 한 차례씩 발표를 했으며, 경북도에서는 김관용 지사가 연사가 되어주었다. 2010년대에는 대구에서는 김범일 · 권영진 시장이, 경북에서는 김관용 지사가 대구와 경북의 미래와 경영전략을 발표해주었다. 역외에서는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관광산업 진흥을 위한 지방정부의 역할에 관해 발표를 하였다.

 

조사 연구와 컨설팅

초기부터 세미나 사업 이외에 경영진단과 조사용역 활동을 시작했다. 경제·경영·과학·기술 분야의 교수들과 변호사·공인회계사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이 회원으로 있었기에 어떤 과제가 주어지면 곧 팀이 짜여 지고, 일이 잘 진행되었다.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 및 기업의 의뢰가 많았다. 가장 큰 규모의 용역은 『세방화(世方化)시대에 대비한 포항제철의 산학협동 전략과 과제』였는데,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경주와 서울에서 여러 차례의 대형 워크숍을 가졌다. 이 연구를 통해 세방화(Glocalization)라는 시대적 상황과 산학협동의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이 과제 수행에 가장 큰 힘이 되어주신 분은 당시 상업은행의 정지태 행장이었다. 정 행장은 1997년 1월의 제81차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하였는데, 그때부터 연구원의 외부 네트워크 강화 및 재정기반 확충에 큰 역할을 해주었다. 그의 주선으로 개원 7주년 기념 세미나(1997년 6월)에 당시 김만제 포항제철 회장을 주제발표자로 초청할 수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위에서 언급한 포항제철 관련의 대형 연구과제를 수탁하게 됐고, 이는 연구기능 강화와 재정기반 확충에 큰 도움이 됐다.

또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연구총서와 보고서 발간 사업에도 착수했으며, 교육 및 컨설팅 사업에도 나섰다. 나의 원장 재임 10년 동안에 『21세기 대구·경북의 지역발전』, 『산학협동과 지역발전』 등의 연구총서와 연구보고서 18종을 발간했다. 그리고 「장안그룹 경영진단」과 「미래형 주거개발에 대한 연구」, 의성군 · 청송군 · 청도군 · 포항시의 개발계획 등 35회에 걸쳐 경영진단과 조사용역사업을 실시하였다. 연구원의 5년사와 10년사도 발간하였음은 특기할만하다.

 

산업교육과 1토회

그리고 1994년 2월부터는 산업교육센터를 설립하여 경영자의 자질향상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의 개발과 함께 종업원 교육훈련 사업을 100여 차례 실시하였다. 교육훈련 대상은 협성농산, 금복주, 남선알미늄, 동양투자신탁 등 주로 지역기업의 임직원들이었다. 산업교육센터는 노동부로부터 13개 과정의 고용보험 지정교육기관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통신교육 및 재취업 훈련과정도 동시에 개설하였다.

『1토회』에 관한 언급도 빠트려서는 안 되겠다. 1992년 6월 27일 해인사 관광호텔에서 열린 “개원 2주년기념 특별 세미나” 자리에서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유대강화를 위해 정기 산행을 갖자는데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그 다음 달인 7월부터 매월 첫째 주 토요일 오후 3시에 모여 주로 대덕산(앞산)에서 정기 등산을 해왔다. 1990년대 후반에는 테마가 있는 산행을 기획하기도 했다. 달서구청과 북구청 같은 유관기관을 방문해 현황설명을 듣고 오찬도 같이 한 뒤, 그 관내의 산을 함께 오르는 것을 말한다. 반응이 매우 좋았다. 초대 간사는 세교세라믹 김주환 대표였다.

1999년 말까지 94차에 걸쳐 정기 산행을 했는데, 회원들 간의 이해와 유대를 증진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 4월부터는 『2토회』로 명칭과 날짜가 바뀌었고, 지금은 『우리(URI)산악회』란 명칭을 쓰고 있으며, 2017년    10월 300차 기념으로 중국 태산(泰山)을 다녀왔다. 연구원 산하의 작은 그룹 중에서 건강증진과 친목 도모를 위해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019년 말 현재 모두 330차례의 산행을 했다.

 

3배로 늘어난 회원과 영구회원 제도의 도입

1990년대에 회원 수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창립 당시 162명이었던 회원이 1999년 말에는 473명으로 약 3배로 증가했다. 학계 회원은 68명에서 221명으로, 산업계는 76명에서 142명으로. 유관기관은 18명에서 110명으로 각각 늘어났다. 재정 규모도 크게 확충되었다. 이와 동시에 연구원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 자생적인 민간 연구기관이 뿌리내리기 어려운 척박한 땅에서 용하게 살아남았다.

초대 이사장인 구영모 사장이 1992년 2월 세상을 떠났다. 그 자리를 그의 친구인 동일산업(주)의 오순택 대표이사가 이어받아 11년을 봉사했다. 연구원 출범 이후 부닥치는 큰 문제는 주로 운영비 조달과 기금 확보였다. 경상경비는 일반 회비와 이사장의 지원으로 간신히 충당되었으나, 연구원 본래의 기능 수행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1995년 1월부터 교수들은 100만원, 기업인들은 1,000만원씩 납부하는 영구회비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경기가 좋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부담이 큰 금액이었다. 영구회원 확보를 위한 기업인 설득이 원장의 또 다른 과외 임무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태창철강의 유재성 회장이 1호 영구회원이 되어주었고, 동일산업 · 청구 · 우방 · 대구은행 · 대구도시가스 · 삼립산업 등의 지역기업들이 적극 호응해주었으며, 상업은행 · 농협 · 신한은행 · POSCO · 대우정보시스템 등 역외 기업들도 동참해주었다. 원장 임기가 끝난 2000년 초에는 법인 영구회원이 20개 사, 학계 및 개인 영구회원이 36명이었으며, 기금이 6~7억 원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무튼 초창기 10년은 연구원의 발전기반을 다지고, 더 높은 단계로의 도약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평가를 받는다. IMF외환위기를 겪으면서도 산(産)과 학(學) 사이에 가로놓인 높은 장벽이 서서히 무너지면서 신뢰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 지역사회의 매우 소중한 사회자본의 축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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