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문화예술의 기억 : 대구 가치의 새로운 정립을 위한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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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49회 작성일 22-07-29 15:04본문
대구 문화예술의 기억 : 대구 가치의 새로운 정립을 위한 그 의미
한국 문학,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의 기저에 대구출신 및 대구를 활동무대로 왕성한 창작을 했던 문인이나 예술가들의 찬란한 작품들이 존재한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시기 등을 거쳐 유년 및 학창시절을 보냈던 세대들에게는 추억을 공유하는 가락과 스토리 속 주인공들을, 오늘의 어린이들에게는 흥얼거리는 멜로디를 탄생시킨 사람들이 대구 기반 예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문화예술사에서 대구의 무게감을 인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시대의 예술 영웅들을 기억하며 그 발자취를 돌아본다.
대구문화예술에서 문학의 이상화, 이육사, 현진건, 유치환, 구상, 김춘수 등이, 서화에서는 서병오, 이인성, 이쾌대가, 음악에서는 박태준, 현재명, 박녹주, 연극영화와 사진의 홍해성, 최계복, 박남옥 등이 이들이다.
대구 문화예술의 터전에 어디 이들 고전적 예술가들뿐인가.
대중음악계에서도 대구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한국전쟁 전후기 우리나라 레코드사의 대부격인 오리엔탈 레코드가 해방직후 대구에서 출발하였고, 오리엔탈 레코드는 한국전쟁 중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대한민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음반사였다. 현인, 남인수, 백년설 등 한국 대중가요계의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오리엔탈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취입하며 활동하였다. 여기에서 ‘비내리는 고모령’. ‘신라의 달밤, ’전선야곡‘ ’럭키서울‘ 등 지금까지도 애창되는 대중가요의 명곡이 발표되었다. 현인의 불멸의 가요인 ’굳세어라 금순아‘는 대구 교동시장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다. 이 곡의 작곡자와 작사자가 대구에서 피란생활을 했던 것이 그 배경에 있을 것이다.
하드웨어측면에서도 1938년 조선 최초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키네마 구락부는 문화극장(현 한일극장)을 거쳐 1952년 국립극장으로 지정되면서 한국공연예술 발전의 요람이 되었던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시작하여 대구의 문화 예술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것은 대구의 새로운 가치 정립에 필요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비록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몇몇 대구 문인 예술인들의 친일이라는 오명은 이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빚어낸, 그리고 한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추억의 대상, 예술작품으로도 결코 상쇄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들이 대구 문화예술 자산 형성에 끼친, 그리고 한국 문화예술계에 미친 영향들에 대한 노고를 평가하는 것은 또 다른 가치 판단에 대한 접근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업화 시기 대구의 위상과 메타버스 시대의 대구의 가치는 달라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대구 가치 정립에 우리는 불멸의 무형자산인 정신문화적 유산을 결코 등한시 할 수 없다. 대구의 영웅들을, 대구를 무대로 활동했던 영웅들을 기리는 사업이 지역 문화예술 자원을 콘텐츠화하는데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어 대구의 가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 소르망은 “한국은 매력적인 ‘Made in Korea’의 브랜드를 형성할 수 있는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어 한국문화가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라고 지적하는데, 한때 한국 문화를 선도하였고, 여전히 한국 문화예술의 저변에 대구 문화예술의 무형자산이 존재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문화예술 자산을 기반으로 한 대구 가치의 재정립 작업, 그리고 이들 무형자산을 발굴, 콘텐츠화 및 사업화를 위해 지방정부, 전문가, 지역민 모두의 관심과 역량이 모아질 필요가 있다.
(본 칼럼은 산학연구원 제360차 세미나(주제: 대구 문화예술의 발자취, 발표: 오동욱 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발표자료에 기반하여 작성함)
한국 문학,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의 기저에 대구출신 및 대구를 활동무대로 왕성한 창작을 했던 문인이나 예술가들의 찬란한 작품들이 존재한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시기 등을 거쳐 유년 및 학창시절을 보냈던 세대들에게는 추억을 공유하는 가락과 스토리 속 주인공들을, 오늘의 어린이들에게는 흥얼거리는 멜로디를 탄생시킨 사람들이 대구 기반 예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문화예술사에서 대구의 무게감을 인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시대의 예술 영웅들을 기억하며 그 발자취를 돌아본다.
대구문화예술에서 문학의 이상화, 이육사, 현진건, 유치환, 구상, 김춘수 등이, 서화에서는 서병오, 이인성, 이쾌대가, 음악에서는 박태준, 현재명, 박녹주, 연극영화와 사진의 홍해성, 최계복, 박남옥 등이 이들이다.
대구 문화예술의 터전에 어디 이들 고전적 예술가들뿐인가.
대중음악계에서도 대구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한국전쟁 전후기 우리나라 레코드사의 대부격인 오리엔탈 레코드가 해방직후 대구에서 출발하였고, 오리엔탈 레코드는 한국전쟁 중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대한민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음반사였다. 현인, 남인수, 백년설 등 한국 대중가요계의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오리엔탈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취입하며 활동하였다. 여기에서 ‘비내리는 고모령’. ‘신라의 달밤, ’전선야곡‘ ’럭키서울‘ 등 지금까지도 애창되는 대중가요의 명곡이 발표되었다. 현인의 불멸의 가요인 ’굳세어라 금순아‘는 대구 교동시장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다. 이 곡의 작곡자와 작사자가 대구에서 피란생활을 했던 것이 그 배경에 있을 것이다.
하드웨어측면에서도 1938년 조선 최초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키네마 구락부는 문화극장(현 한일극장)을 거쳐 1952년 국립극장으로 지정되면서 한국공연예술 발전의 요람이 되었던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시작하여 대구의 문화 예술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것은 대구의 새로운 가치 정립에 필요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비록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몇몇 대구 문인 예술인들의 친일이라는 오명은 이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빚어낸, 그리고 한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추억의 대상, 예술작품으로도 결코 상쇄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들이 대구 문화예술 자산 형성에 끼친, 그리고 한국 문화예술계에 미친 영향들에 대한 노고를 평가하는 것은 또 다른 가치 판단에 대한 접근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업화 시기 대구의 위상과 메타버스 시대의 대구의 가치는 달라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대구 가치 정립에 우리는 불멸의 무형자산인 정신문화적 유산을 결코 등한시 할 수 없다. 대구의 영웅들을, 대구를 무대로 활동했던 영웅들을 기리는 사업이 지역 문화예술 자원을 콘텐츠화하는데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어 대구의 가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 소르망은 “한국은 매력적인 ‘Made in Korea’의 브랜드를 형성할 수 있는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어 한국문화가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라고 지적하는데, 한때 한국 문화를 선도하였고, 여전히 한국 문화예술의 저변에 대구 문화예술의 무형자산이 존재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문화예술 자산을 기반으로 한 대구 가치의 재정립 작업, 그리고 이들 무형자산을 발굴, 콘텐츠화 및 사업화를 위해 지방정부, 전문가, 지역민 모두의 관심과 역량이 모아질 필요가 있다.
(본 칼럼은 산학연구원 제360차 세미나(주제: 대구 문화예술의 발자취, 발표: 오동욱 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발표자료에 기반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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